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는 완전히 달라졌다. ‘평생 고용’은 과거의 역사로 사라지고, '사오정'(45세면 정년) '오륙도'(56세에도 회사에 다니면 도둑) 등이 유행어로 자리 잡았다. 대학을 막론하고 서열 최상위는 의대가 차지하게 됐다. '평생 자격증'을 따려는 수재들이 몰려든 결과다.
실제로 의대 열풍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2023학년도 정시 합격자의 성적 상위 20개 학과는 모조리 의대·치대·한의대였다. 대기업 취업과 연계된 연세대 등 주요 4개 대학 반도체 학과는 총 47명 모집에 예비 합격자를 포함한 합격자 73명이 이탈(등록 포기율 155.3%)했다. 대부분 의대를 택한 것으로 파악된다. 대학은 6수, 7수를 해서라도 의대로 옮겨 가겠다는 반수생으로 넘쳐나고 있다.
먹고 사는 데 지장 없고, 남 보기에 그럴듯한 직업, 간단히 말해서 부와 명예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의사'라는 직업에 목숨을 거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그래서 명문대 웬만한 학과에 합격하고도 의대, 치의대, 한의대, 약대, 수의대에 재도전하기 위해 자퇴, 반수 등 별의별 시도를 하는 대학생들이 많은 모양이다. 지난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에서 자퇴한 학생 수만 1874명이다.
의대 열풍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준비해야 의대에 합격한다는 학원가의 상술로 '초등 4학년 의대 입시반'이 탄생했다. 초등 6학년 자녀를 둔 학부모가 이 광고를 보고 학원으로 달려갔더니, 너무 늦었다는 학원의 말을 들었다고 한다.
어떻게 바꿔야 할까. 의대 열풍의 이면에는 근본적으로 '혁신'보다 '기득권'이 대접받는 우리 사회의 그림자가 자리 잡고 있다. 의대 정원은 18년째 3058명으로 묶여 있다.
2020년 기준 한국의 의사 수는 인구 1000명당 2.5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꼴찌인 멕시코(2.4명) 다음으로 적다. 한의사를 제외하면 최하위다. 자격증과 정원 제한이라는 이중 울타리 속 의사들의 기득권은 갈수록 공고해지고 있다. 2020년 기준 국내 의사 평균 연봉은 2억3070만원으로 대기업 직원 평균(7008만원)의 세 배를 넘었다. 지방 의료원은 3억원대 연봉을 제시해도 의사를 구하지 못하는 사례가 나올 정도다. 반면 한국 최초의 우주발사체 '나로호'를 쏘아 올린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의 정규직 연구원 1인당 평균 보수는 9595만9000원(2021년 기준)에 불과했다.
기득권에 맞서 의대 정원을 대폭 늘리는 것이 혁신의 시작일 것이다.
시간이 많지 않다. 선진국 인재들이 챗GPT를 개발하고 있을 동안 한국의 인재들은 챗GPT에 '의대 가는 법'이나 물어보고 있다면 더 이상 이 나라의 미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