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 이광표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된 국내 은행 과점 체제 해소 논의가 백지화될 가능성이 커졌다. 금융당국이 참고할 만한 사례로 꼽았던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부터 시작된 연쇄 파산사태 때문이다.
실제로 신중론에 힘을 실리는 분위기다. 당국은 경쟁을 촉진하기 위해 SVB와 같은 특화은행을 도입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지만 금융 불안정성이 심화할 수 있다는 우려만 커진 상황이다.
앞서 3월부터 금융당국은 국내 은행권 과점 체제 해소를 위한 움직임에 나섰다. 2월 비상경제민생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은행 산업의 과점 폐해가 큰 만큼 실질적인 경쟁 시스템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데 따른 조처다.
금융당국은 지난해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이 높은 순익을 기록한 것엔 사실상 과점 체제가 형성된 영향이 컸다고 봤다. 이에 따라 다양한 사업자가 특정 영역에서 서비스를 하는 특화은행 등을 도입해 과점 체제를 허물고 경쟁을 촉진하겠다는 구상을 내놨다.
금융위원회는 곧장 ‘은행권 경영·영업관행·제도 개선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3월 초 1차 회의를 열며 의욕을 보였다. 은행권 경쟁 촉진을 위해 은행권 내 경쟁뿐 아니라 은행권과 비은행권 경쟁, 금융과 IT 간 영업 장벽을 허무는 방안 등을 청사진으로 내놨다.
특히 스몰 라이선스(은행별 라이선스를 기능별로 세분화하는 것)와 챌린저뱅크(소규모 신생 특화은행) 등 업무 범위를 세분화한 특화은행 설립 방안이 주목받았다.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벤처기업 대출 전문은행이나 지급결제 특화은행이 대표적 예다.
은행과 비은행권 간 경쟁 촉진 방안으론 비은행 금융사들의 업무 영역을 확장하는 안을 검토했다. 카드사의 종합지급결제와 증권사의 법인 대상 지급결제, 보험사의 지급결제 겸영 허용 등이다.
TF는 논의를 본격화하기도 전에 커다란 암초를 만났다. 미국 SVB 파산을 시작으로 크레디스위스(CS) 매각, 도이체방크 위기설 등이 잇달아 터지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의 위기감이 높아진 것이다.
공교롭게도 SVB는 금융당국이 특화은행 성공사례로 제시했던 은행이다. SVB는 스타트업 고객을 주로 상대해 특화은행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특정 부문에 여신이 집중된 구조가 파산을 초래했다는 점이 우려를 낳았다.
강한 의지를 내비친 바 있기 때문인지 금융당국은 SVB 사태 직후 이를 외면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SVB는 수많은 특화은행 중 하나일 뿐이며 이 은행의 파산으로 특화은행 전체가 문제라는 식의 접근은 맞지 않다’는 게 금융당국의 태도였다.
3월 16일 열린 회의에서도 “SVB 사태 이후 관련 정책에 변화가 있느냐”는 질문에 “1차 회의에서 논의했던 스몰 라이선스 등 경쟁 촉진 방안에 대해선 지금도 같은 상황을 전제로 검토하고 있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여론이 악화된 후에야 한발 물러섰다. 같은 달 29일 열린 회의에서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금융소비자 편익 증대와 경쟁 촉진뿐만 아니라 금융안정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TF에서 논의한 스몰 라이선스의 장단점과 경쟁에 미치는 효과, 실효성 등을 바탕으로 스몰 라이선스 도입 여부와 도입 방법 등에 대해 국민과 금융권 등 각계의 목소리를 듣고 공감대를 형성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당국이 은행 과점 체제 해소를 위해 규제를 대폭 완화할 경우 금융시장의 안정성과 공정성이 저해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4월 초 김동환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보고서 ‘경쟁 제한적 금융규제 완화를 위한 제언’에서 “금융 규제 완화를 통해 효율성을 제고하는 데에만 신경을 쓰다 보면 안정성이나 공정성이 훼손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7월 자본시장연구원도 ‘실리콘밸리은행그룹 모델의 국내 도입 가능성 진단’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한국에서는 SVB식 사업 모델이 성공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정책금융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벤처기업들과 미국의 벤처 생태계와는 차이가 크다는 게 근거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국내 벤처기업들은 정책금융 기관의 보증 기반 대출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 높은 이자 비용을 내면서 벤처 대출을 활용할 유인이 크지 않다”고 지적했다.
금융권 안팎에서는 은행 간 경쟁을 촉진해 소비자의 선택권을 넓히겠다는 취지는 좋지만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조급하게 정책을 추진한 점이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특화은행 도입 취지는 좋지만 인터넷은행 사례에서 알 수 있듯 기존 은행과 차별화된 서비스를 만들어 경쟁력을 갖는 게 쉽지 않다”며 “은행에 대한 비판 여론만 의식해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놓으려 할 게 아니라 장기적 논의를 통해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