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고물가·고금리에 자금조달 부담↑
정부, 선별적 정책금융 통한 지원에 고심
매일일보 = 최동훈 기자 | 국내 주요 기업들이 경기 침체 장기화에 따른 수익 악화로 자금 조달에 진땀을 빼고 있다. 올 하반기 전망도 흐린 상황에서 기존 사업 강화와 신사업을 위해 대규모 투자금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현금흐름이 나빠지고 있어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29일 재계에 따르면 올 하반기 산업별 경기에 대한 국내 기업들의 부정적 전망이 이어지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매출 상위 600개사를 대상으로 설문해 다음달 기업경기실사지수(BSI)를 분석한 결과 96.9로 산출됐다. BSI가 100보다 낮을수록 기업들이 전월 대비 이달 경기 흐름을 부정적으로 전망한다는 뜻이다. BSI는 지난 1월 88.5를 기록한 후 갈수록 상승하는 추세를 보였지만, 지난달까지 18개월 연속 부정적 전망이 이어지며 위축된 분위기다.
추광호 전경련 경제산업본부장은 “최근 한국 경제는 최대 교역국인 중국경제의 불안정 심화, 고환율․고유가 등 대외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에 직면해있다”고 분석했다.
산업계의 부정적인 관점은 최근 고금리, 미국·중국발 금융 변동성 등 요인으로 인해 악화 중인 자금조달 사정에서도 엿볼 수 있다. 미국, 중국 등 기축금리 국가이자 한국의 주요 교역국인 강대국에서 발생한 신용경색 위기가 한국의 자금 조달 사정에 악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들 국가의 유동성이 한국의 유동성과 긴밀히 연계돼 있어 현지 금융 분야의 변화가 나비효과처럼 불어나 한국 경제에 작용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최근 민간의 자금조달 창구인 주요 은행의 신용등급이 일제히 하락했다.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최근 금리 급상승, 상업용 부동산 리스크 등을 이유로 미국은행 5곳의 신용등급과 이 중 일부 은행의 등급 전망을 하향 조정했다.
은행 신용등급의 하향 조정은 동종업계 뿐 아니라 은행권 차입으로 경영자금을 조달하는 산업 전반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점에서 산업 전반의 악재로 꼽힌다. 앞서 지난 3월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하면서 미국 은행권에서 비롯된 업종별 파산 릴레이로 얼어붙기 시작한 자금 조달 시장은 좀처럼 녹지 못하는 실정이다.
중국에서도 지난 2021년 말 헝다 그룹에 이어 최근 비구이위안 등 현지 부동산 업체들이 잇달아 채무를 이행하지 않아 글로벌 신용경색에 불 지피고 있다. 중국 정부의 경기 부양책에 힘입어 경제 성장을 이끌어온 부동산 업체의 유동성 문제가 산업 전반에 악영향을 끼치는 중이다.
한국 재계는 미국, 중국의 유동성 우려에 노심초사하고 있다. 지난 상반기 유동성 우려의 조짐이 현실에 나타나고 있다. 주요 그룹 주력사들의 순이익을 비롯한 영업활동 현금흐름이 약화한 반면 차입을 통해 조달한 자금 규모가 늘어난 실정이다. 이 같은 추세는 주요 그룹 뿐 아니라 산업 전반에서 이어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민간의 사업 경쟁력 쇄신을 통한 수익 창출력 강화 뿐 아니라 정부의 발빠른 유동성 확보 노력이 필요하다는 진단이 나온다. 실제 삼성, SK, 현대자동차, LG 4대 그룹은 우수한 수익 창출력을 기반으로 차입 등을 통해 운영·시설자금을 적극 조달하고 있다. 이들을 비롯한 기업들도 역전된 한미 금리와 한국은행의 금리동결 등 경제활성화 정책을 밑받침 삼아 경쟁력 강화를 위한 실탄 마련에 힘쓰는 중이다.
정부는 기술, 공급망에 관한 기업투자에 세제혜택을 지원하거나 회사채를 기초자산 삼아 중소기업의 신용등급을 올려 자금조달 편의를 제공하는 등 정책 금융을 확대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부실 기업이 아니라 성장 가능성을 갖춘 기업을 선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고심하는 중이다.
장보성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시장의 정상적인 기능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정부의) 대응이 지연될수록 수습에 필요한 유동성이 증가할 수 있다”며 “선별적인(targeted) 유동성 공급을 통해 신속하게 분리 대응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도 효과적인 대응 방향”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