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 첨단기술 패권 전쟁이 분초를 다투는 국가 대항전으로 펼쳐지고 있는 가운데 미국·중국·유럽·대만 등 반도체 분야에서 우리의 강력한 경쟁자들이 날고뛰는 동안 우리 반도체산업이 처한 현실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주요국들은 반도체 등 국가 전략 산업 지원에 수십조 원씩 보조금을 뿌리고 자국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통상 분쟁도 불사하고 있어서다.
중국이 미국의 반도체 장악에 맞서 64조 6,700억 원(3,440억 위안) 규모 기금을 만들어 ‘반도체 굴기’에 나서고 있다. 앞서 중국은 2015년 하이테크 산업 육성 프로젝트인‘중국 제조 2025’를 출범시키며 두 차례 기금을 조성했다. 2014년 1차 펀드 26조 원의 반도체 생산, 2019년의 2차 펀드 38조 원의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에, 이번 3차 펀드 64조 원은 반도체 제조용 장비에 집중적으로 투입하는 것을 포함한다면 최근 10여 년 동안 130조 원에 육박하는 거액을 반도체산업에 투자한 것이다. 중국은 이번 기금을 통해 인공지능(AI) 시장에 초점을 맞출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자유무역과 시장 자율을 중시하던 미국, 유럽연합(EU)조차 국가 주도의 산업 정책을 부활시키며, 중국 못지않게 반도체산업 지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은 차세대 반도체 개발에 약 110조 5,000억 원을 투자하면서 반도체 패권을 놓고 중국과 경쟁하고 있다. ‘TSMC 보유국’ 대만은 10년간 12조 7,000억 원을 쏟아부어 반도체 설계와 AI(인공지능) 분야 해외 스타트업을 대만으로 유치하고 글로벌 반도체 전문가를 육성하는 등의 대규모 프로그램을 지난 3월 시작했다.
이렇듯 글로벌 경제 ‘게임의 룰’이 대 변혁을 일으키고 있다. 첨단 미래 핵심 분야는 승자 독식 구조다. 한번 뒤처지면 국가 경쟁력은 순식간에 추락하고 안보마저 위협받는 시대가 됐다. 서울경제신문이 ‘서울포럼 2024’의 주제를 ‘기술패권 시대 생존 전략’으로 잡은 것도 이러한 판단 때문이다. 지난 5월 28~29일 이틀간의 일정으로 열린 서울포럼에서 세계적인 석학들과 과학기술인·기업인들은 인공지능(AI)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의 생존 전략을 제시했다. 이들은 한국이 선진국을 후발 추격하는 성장 모델에서 벗어나 초격차 기술을 선도하려면 파격적인 연구개발(R&D) 지원, 교육 개혁을 통한 창의적인 인재 양성 등이 필수라는 권고를 새겨들어야만 한다.
한편 세계 주요국들은 에너지와 광물을 확보하기 위해 국력을 쏟아붓고 있는 가운데 한국 기업이 지분을 보유한 국내외 핵심 광물 광산이 주요 경쟁국에 비해 크게 부족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5월 28일 한국경제인협회의 분석에 따르면 2022년 기준 한국 기업이 보유한 핵심 광물 광산 수는 36개로 중국의 1,992개, 미국의 1,976개에 비해 크게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동·아연·철광석 등 핵심 광물 7종의 귀속 생산량이 전 세계 총합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한국은 모두 1%를 밑돌았다. 반면 일본 기업이 동(4.1%)과 아연(3.0%), 철광석(3.0%)에서 귀속 생산량 비중이 1% 이상을 기록한 것과 대비된다. 귀속 생산량이란 광산의 총생산량에 기업 지분율을 곱한 값을 의미한다.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이 격화하는 가운데 중국이 노골적으로 핵심 광물 자원을 무기화하고 있는 것도 에너지와 자원이 글로벌 경쟁력 확보와 안보에 직결되고 있음을 각별 유념해야 한다.
미국과 일본, 대만, 중국 등이 국가 미래가 달린 반도체산업의 경쟁력 강화에 총력전을 펴는 이 중대한 시점에 우리는 최소한의 반도체 지원법조차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채 29일 종료하는 21대 국회에서 무더기로 폐기되는 사태를 맞았다. 반도체 등 국가 전략기술에 시설 투자를 하면 15~25% 세금을 돌려주는 조세특례제한법이 올해로 일몰을 맞게 된다. 이를 2030년까지로 연장해주는 법 개정안이 올 1월 발의됐는데 역시 폐기된다. 반도체산업에 대한 최소한의 세제 혜택조차 올해를 넘기면 사라질 판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서울포럼 축사에서 첨단 로봇 등 12대 국가 전략기술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하며 “새로운 100년을 이끌어 갈 성장 동력을 반드시 만들어내겠다”라고 밝힌 바 있다. 관건은 속도감 있는 실행력이 아닐 수 없다. 정부가 지난 5월 23일 26조 원 규모의 반도체 지원 프로그램을 제시했지만, 보조금 지급 등이 빠져 있어 주요 경쟁국에 비교해 턱없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첨단기술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으려면 산·학·연·정(産·學·硏·政) 모두가 비상한 위기의식을 갖고 ‘원팀(One team)’으로 똘똘 뭉쳐 총력전을 펼쳐야만 한다. 정부는 전폭적인 세제·금융 지원과 규제 혁파, 교육 개혁 등을 서둘러야함은 당연하다.
무엇보다도 첨단 바이오, 인공지능(AI)과 함께 반도체를 이을 미래산업의 핵심인 양자 과학기술 개발과 육성에도 의지를 갖고 국가역량을 집주(集注)해야 한다. 정부는 규제 완화, 정책금융 강화 등에 속도를 내고 지난 5월 29일 국빈 방한한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나하얀 아랍에미리트연합국(UAE) 대통령과 가진 정상회담을 계기로 정교한 ‘중동 2.0’ 경제 외교로 기업 진출을 뒷받침해야 한다.
치열한 글로벌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 세계를 선도하려면 민·관(民·官) 이 하나로 원팀이 돼 해외자원 영토를 넓혀야만 한다. 무엇보다 기업이 핵심 광물을 확보할 수 있도록 민간의 해외자원 개발 투자에 대한 정책금융 지원 프로그램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해외자원 개발에서 성과를 내려면 단기적인 손익보다 전략적인 이익에 중점을 두고 일관성 있게 지속 추진해야 한다.
특히 핵심 광물 조달은 장기 공급계약에만 의존할 게 아니라 지분 보유를 통한 방식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다만 핵심 광물 조달이 중국 등 특정국에 치우치지 않도록 수입선을 다변화해야 공급망 리스크를 줄일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박근종 작가·칼럼니스트(성북구도시관리공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