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총리가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나라당과 특정 언론을 비하한데 따른 국회의 장기 공전사태를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이 추안거(秋安居工程)에 들어갔다고 표현했다 해서 화제다.노 의원은 최근 자신의 홈페이지 ‘난중일기’에서 “하안거(夏居安)는 원래 여름날 돌아다니다 보면 살아있는 벌레들을 해치게 될까봐 불교 수행자들이 바깥나들이를 삼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며 “정치권은 지금의 명분없는 추안거(秋居安)를 빨리 끝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국회 밖으로 나오면 국민들로부터 맞아 죽을까봐 국회 안에 갖혀 지내는 진짜 추안거(秋居安), 동안거(冬居安) 신세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안거(居安)란 산스크리스트어의 ‘바르사(varsa)'를 우리말로 옮긴 것으로, 장마비가 내리는 우기를 뜻한다. 인도의 기후는 겨울이 있는 우리와는 달리 비가 계속 오는 우기가 3개월간이나 계속된다.부처님 당시 수행자는‘집 없는 사람’,‘숲에 거주하는 사람’ 등으로 불리었다. 이들은 나무 밑이나, 석굴, 냇가, 묘지 등에 기거하면서 가까운 마을에서 탁발하거나 나무 열매를 따먹으며 수행했다. 때문에 우기가 되면 돌아다니며 수행하기가 무척 어려웠다.이런 까닭에 부처님은 우기 90일 동안 안거에 들게 했다. 돌아다니기가 불편하고, 자신도 모르게 자라나는 초목이나 벌레를 밟아 죽일 수도 있어 가급적 일정한 곳에 머물며 오로지 수행에 힘쓰라는 뜻이었다. 이 기간 동안 비구들은 절이나 암굴 같은 곳에서 안거했고, 그동안의 공양은 재가신도나 절에서 마련해 주었다. 안거하는 동안 비구들의 외출은 엄격하게 제한됐고 이러한 전통은 오늘에도 계속되고 있다.더운 인도에서 일년에 한차례 하던 안거는 불교가 추운 지방으로 전파되면서 추위를 피하기 위한 겨울 안거가 추가됐다. 우리나라에서도 수행을 위해 여름과 겨울, 두차례 안거를 행한다.이런 안거가 느닷없이 정치권의 이전투구에 따른 국회공전사태를 표현하는 용어로 둔갑했다. 수행 정진을 위한 안거가 국회의원이 싸움하다 토라져 일은 안하면서 세비는 꼬박 받아 챙기는 ‘무노동 유임금’을 의미하는 말로 그 뜻이 변한 것이다. 이러다가 우리 국회에는 춘안거(春居安)마저 생겨나 사시사철 수행은 안하고 노는 것으로 안거하는 사태가 벌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어쨌거나 노 의원 표현대로의 국회 추안거는 이 총리의 사의(謝意) 성명서 한 장으로 일단락 됐다. 직접도 아니고 공보수석이 대신 읽었다. 이런 식의 사과도 아닌 사의 표명하는데 2주일이나 걸린 것이다.또한 이 성명서에는 그동안 국회공전과 관련해 국민에게 잘못했다는 진심어린 사과 한마디 없다. 이런 성명서를 들어야 하는 국민은 그저 착잡하기만 할 따름이다. 여(與)와 야(野)가 기싸움으로 지새운 날이 어디 이번 뿐이었는가. 그래도 싸움을 멈출 때는 자기들 싸울 때도 아무 불평 없이 세금 꼬박꼬박 낸 국민들에게 립서비스라도 하는 게 도리다. 이제는 이런 립서비스조차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니 세금 낸 국민은 자기들 머슴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치는 상생의 정치보다 상쟁의 정치가 되기 쉽다. 내가 너를 이기기만 하면 국민들이야 어차피 이긴 쪽을 쫓아올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발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이번 추안거 동안 국회는 무엇을 화두로 용맹정진 했을까. 그저 내라는 대로 세금 꼬박꼬박 낸 죄밖에 없는 국민들은 그저 이것이 궁금할 뿐이다.慧 鍾 스님/심복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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