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상권 ‘청계천’ 포기하고 ‘동대문’ 택했더니 “떠나 달라~”
상인 “돈없고 빽없는 게 죄냐?” 항의에 돌아온 건 용역깡패
이전 희망했던 일부 상인에게 돌아온 건 ‘입주 거부’ 메시지
각계 “동대문 문화유산으로 보호하라” 요구에 서울시 ‘냉담’
[매일일보닷컴] 지난 83년간 한국 스포츠 역사와 함께 했던 동대문운동장이 14일을 기점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동대문 일대를 디자인 산업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지난 2000년 이후 경기장으로 사용하지 않고 있는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고, 대신 그 자리에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파크’를 건립하겠다는 서울시 방침 때문이다.
이 같은 이유로 이곳에서 사라지게된 것은 ‘동대문운동장’만이 아니었다. 청계천 복원공사로 인해 청계천 일대에서 밀려난 노점상 상인들이 이후 이곳에 모여 생업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
2004년 당시 서울시는 상인들에게 ‘동대문운동장 축구장 내 영업허가’라는 조치를 내렸고, 상인들은 수 십 년간 쌓아온 청계천 ‘황금상권’을 포기하고 동대문에서 새로운 상권을 형성해 나갔다. 그런데 상인들은 4년여 만에 ‘서울시 공원화’라는 서울시 방침으로 인해 또 다시 짐을 싸야만 했다.
현재 대부분의 상인들은 서울시가 지정한 새로운 풍물시장 부지로 옮겨 영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상인들은 축구장 입구에 천막을 치고 “서울시는 이명박 대통령이 시장이던 시절, 동대문을 세계 최고의 풍물시장으로 만들어주겠다던 약속을 이행하라” “상권이 죽어있는 새로운 부지로는 이전할 수 없다”며 한 달여 째 농성을 이어오고 있다.
동대문운동장 축구장 철거가 진행되기 전날인 지난 13일 정오경, 축구장 입구 일대에 ‘맛있는’ 김치찌개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 냄새의 진원지는 바로 동대문 풍물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노점상인 80여명이 모여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는 곳이었다. 그들은 지난달 16일부터 그곳에 천막을 치고 숙식을 해결하며 풍물시장 복원을 촉구하고 있었다. 때마침 대책회의를 마친 옛 풍물시장 노점 상인들이 점심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둘씩 천막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기자가 천막농성장 주변으로 다가가자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50~60대 상인들은 기자를 풍물시장을 찾은 손님으로 착각하고 “시장 없어졌어. 공사 때문에 길도 막혔으니까 더 들어가지 마. 위험해”라며 한숨 섞인 말을 건네 왔다.보통 환갑을 넘으면 집에서 편히 쉴 법도 하다. 그런데 이들은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비닐 천막 속에서 이불 한장에 의지해 약 한달 째 노숙을 하고 있다. 천막농성 뿐만이 아니다. 60세가 넘는 나이에 고공농성도 불사하는 투쟁의지를 내비쳤다. 동대문풍물시장 사수대책위원회(이하 풍물시장 사수대책위) 양연수(63・남) 대표를 비롯한 3명의 60대 노점 상인들은 지난 3월 동대문운동장 조명탑에 올라가 젊은이들도 버티기 힘든 고공시위를 19일간 벌였고, 심지어 그중 10일은 단식을 하기도 했다. 이들이 이토록 원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60대 노인들이 목숨을 건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일까.철거 위협에서 벗어나려 선택했던 ‘동대문행’
이들은 과거 청계천 일대에 ‘도깨비 시장’이 존재할 때부터 최근 동대문운동장의 ‘풍물시장’까지 수 십 년째 노점행상을 해온 사람들이다. 이들이 판매한 물품들은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구식 가전제품들을 비롯해 엽전, 전축, 낡은 LP판 등과 같이 옛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중고품, 짝퉁 명품, 구제의류, 각종 아이디어 상품, 성인용품에 이르기까지 그 상품품목의 제한은 없었다. 말 그대로 ‘만물상(萬物商)’이었던 것.다양한 상품들이 구비돼 있는 까닭에 시민들 사이에서는 “청계천에 가면 무엇이든 있다”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됐고, 그 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더욱 많아졌다. 또 상인들은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이곳에서 한자리 차지하기 위해서는 노점임에도 불구하고 ‘꽤’ 높은 가격의 바닥 권리금을 지불해야만 했다. 하지만 노점 상인들은 지난 2004년 ‘황금상권’ 청계천을 복원사업으로 인해 포기하고, 동대문운동장 축구장 내에서 장사를 하라는 서울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권리금, 인지도, 많은 유동인구 등 여러 이점을 포기해야했지만 언제 철거될지 모른다는 위협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노점 상인들에게는 지방자치단체가 나서 노점상들이 마음 놓고 장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준다는 얘기는 마냥 반가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에 수반되는 단점이 더 많았다. 넓은 지역에 분포돼 있던 노점상들이 ‘운동장’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 모이다 보니 똑같은 품목을 판매하던 상인들이 좁은 공간에 모이게 돼 상인들간에는 경쟁이 더욱 심화됐다. 또 ‘길거리’가 아닌 밀폐된 ‘공간’이다보니 좌판간의 간격이 좁아져 손님들의 통행이 불편해졌다. 화장실을 찾으려고 해도 운동장을 한참 돌아야했다. 하지만 이들 노점 상인들은 각종 불편을 감수하고도 이곳에 적응해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눈과 비를 막기 위해 운동장 위로 뚫린 허공에 차양막을 치고, 전기를 공급해 정상적인 영업을 꾸려나가기 시작했다.“다시는 안 쫓겨날 줄 알았는데…”
그렇게 새로운 터전에 익숙해지고, 시민들 뇌리에도 청계천 ‘도깨비 시장’이 아닌 ‘동대문 풍물시장’으로 자리 잡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상인들에게는 동대문 부지를 떠나달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임기 내에 서울시에 세계적인 디자인센터를 짓겠다는 오세훈 시장 공약의 희생양(?)으로 너무 낡아서 더 이상 경기장으로의 사용되지 않는 ‘동대문 운동장’이 선택된 것. 이 같은 서울시의 계획을 놓고 동대문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노점상뿐만 아니라 문화계, 체육계 등 각계에서는 일제히 반대 목소리를 냈다. 우리나라 경기장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고, 한국 근대 체육계의 무대라는 역사적 가치를 고려한다면 문화유산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울시는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12월 13일 야구장 철거를 시작으로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파크’ 건립을 강행하며 축구장 내에서 장사를 하던 풍물시장 상인들에게는 신설동의 옛 숭인여중 부지로 또 다시 이전할 것을 요구했다. 청계천에서 동대문으로 자리를 옮긴지 4년만의 일이었다.
서울시, 노점 상인에 폭력으로 대응
상인들도 이에 손 놓고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았다. 서울시 정책에 반기를 들고 현 위치에 풍물시장을 유지해줄 것을 요구했다. 골목에 위치해 있는 신설동 숭인여중 부지는 동대문운동장에 비해 상권이 열악하고, 그곳에서 또 다시 ‘터닦기’를 위해 지난 4년과 같은 시간을 반복할 수는 없다는 게 이들 상인들의 이전 반대 이유였다.폭력의 대상에는 여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김모(38・여)씨는 폭력을 피하려 컨테이너 박스위로 올라갔다가 한 용역에 의해 아래로 던져져 목뼈를 다쳤다. 김씨는 기자가 찾아간 지난 13일에도 목에 깁스를 한 채로 천막을 지키고 있었다. 이와 관련 서울시 관계자는 이날의 충돌에 대해 “상인들과 용역업체 직원들이 서로 폭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부상자가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동대문 풍물시장 세계화’ 약속은 어디로?
이 같은 두 번의 폭력침탈에도 불구하고 풍물시장 사수대책위는 세번째 천막을 짓고 또 다시 결의를 다졌다.이와 관련 풍물시장 사수대책위 홍경희 기획부장은 “우리 요구하는 것은 하나다. 이명박 대통령이 시장 시절 약속했던 ‘동대문 풍물시장의 세계화’를 이행하라는 것”이라며 “서울시에서 배정한 숭인여중 부지는 상권이 없어 찾아올 사람이 없다. 그곳에 들어간 사람들도 마지못해 들어간 것이지 장사가 되지 않는다고 전해왔다”고 말했다. 풍물시장 사수대책위측 주장대로 숭인여중 부지의 상권은 동대문운동장에 비해 열악했다. 새로 개장한 서울풍물시장은 지하철 1호선 신설동역에 위치하고 있는데 병원, 식당 등의 건물이 늘어서 있는 길을 따라 100여m 걸은 후 나타나는 동대문 도서관 뒷골목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다양한 남녀노소, 밤낮을 불구하고 유동인구가 항상 많은 동대문 운동장과 비교하면 천양지차의 입지조건이다. 건물의 규모면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였다. 신설동 서울풍물시장 입구는 동대문에서 보던 그것과 마찬가지로 곰방대, 부채, 도자기 등이 진열돼 있어 낯익은 풍경을 연출했다. 그러나 각각의 점포 크기와 모양은 마치 밀리오레나 두타와 같은 패션 쇼핑몰을 보는 듯 1점포당 두 사람이 간신히 서있을 정도 좁은 공간에 물건이 진열돼 있었다.“‘입맛대로’ 풍물시장 입주자 선정했다”
그러나 현재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는 상인들 중에서도 신설동으로의 이전을 희망했던 사람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부의 약속이행과 제공된 부지의 상권보장 촉구도 중요하지만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하기에 ‘서울풍물시장 입주’가 필요했던 것.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입주 거부’였다. 그 이유는 서울풍물시장 상인회와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풍물시장 사수대책위 한 관계자는 “남아있는 80여명 중 15명가량이 입주 신청을 했다가 거부당했다”면서 “동대문풍물시장 상인회에는 중구, 도깨비, 서울노련 등 5개 조직이 있는데 상인회 뜻과 맞지 않는 조직원들은 배제시키고, 오히려 서울풍물시장에 입점할 자격 없는 운동장 밖의 노점상을 입주시켰다”고 주장했다.또 “풍물시장을 숭인여중 부지로 이주하기로 상인들과 합의했다”는 서울시측 입장에 대해 “서울시가 합의한 주체는 상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대표가 아니었다”는 게 풍물시장 사수대책위측 주장이다.이와 관련 풍물시장 사수대책위 양연수 대표는 “2004년 동대문 풍물시장이 조성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5인대표’라는 단체가 등장했다. 이들은 상인회를 자칭하며 독단과 비리를 일삼았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양 대표는 “이들은 풍물시장 이주조건으로 시와 결탁, 돈을 받아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특히 전국노점상연합회는 이를 계기로 상인 자치회 모 위원장을 전노련에서 제명시키고 그는 경찰에 구속돼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반동분자와는 함께 일 못해”
이 같은 풍물시장 사수대책위의 주장에 대해 서울풍물시장 상인회 관계자는 “서로 이해관계가 달라서 불거진 오해일 뿐”이라며 일축했다.이 관계자는 “모 위원장이 전노련에서 제명되고 구속된 것은 지난해 지방에서 있었던 노점상 집회가 폭력집회로 이어져 집회 신고자로 등록돼 있던 모 위원장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진 것”이라며 “풍물시장과는 상관없다”고 전했다.또 서울풍물시장 입주 배제설에 대해서는 동대문에 남아있는 상인들 탓이라며 책임을 회피했다. “현재 동대문에 남아있는 상인들과는 앞으로도 함께 일할 뜻이 전혀 없다. 그들은 차양막 설치를 위해 상인 1인당 갹출하는 돈은 물론, 전기세․청소비 등과 같은 관리비를 납부하지 않았다”면서 “그들은 상인회에서 주관하는 일에는 반기를 들고 협조 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빨갱이․반동분자와 같은 존재였다”고 말했다.이에 대해 사수대책위측은 “투표를 통해 뽑아진 대표도 아니고 서울시와 결탁한 대표의 말을 따를 수 없다”면서 “또 애초에 차양막 설치는 서울시에서 해주기로 돼있었다. 그리고 차양막 설치비를 지불하지 않은 상인은 우리 중 절반에 불과하다. 차양막비 미납을 빌미로 입주를 배제시킨 것은 부당하다”고 해명했다. 어찌됐건 현재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는 풍물시장 사수대책위의 80여명 상인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했다. 용역들로부터 폭력침탈 당해 상인들의 물건도 모두 뺏긴 상태라 장사를 할 수도 없고, 서울풍물시장측은 이들의 입점을 아예 허가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하지만 사수대책위측도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홍 기획부장은 “우리도 신설동 풍물시장으로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명박 대통령이 약속했던 ‘동대문 풍물시장 세계화’를 지킬 수 없다면 서울시가 동대문운동장을 대체할 수 있는 제대로 된 부지를 내놓을 때까지 끝까지 투쟁하겠다”면서 “시청 앞 광장 잔디가 아주 부드럽고 좋더라. 정 안되면 그 곳에서 노숙농성을 할 계획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한편 서울시측 역시 동대문에 남아있는 80여명의 상인들의 거취에 대해 냉담한 반응이다. 서울시 가로환경개선과 한 관계자는 “농성중에 있는 상인들에 대해 고민 하고 있다. 구체적인 방안이 나온 것은 없지만 검토중에 있다”면서도 “노점은 불법이기 때문에 시에서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며 책임을 회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