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자 © 매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요즘 공공기관 사장이나 임원들은 공무원의 전화가 오면 바로 녹음부터 한다고 합니다. 젊은 공무원들은 바깥에 자리가 없는지 찾고 있고요. 이런 분위기에서 공직사회가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며칠 전 공무원 출신 OB 몇 명과 가진 저녁자리에서 윤석열 정부 출범초기에 벌어지고 있는 사정 정국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문재인 정부도 출범초기에 ‘적폐청산’을 내세우며 사정의 칼날을 휘둘렀다. 과거 어떤 정부에서도 경험할 수 없었을 정도로 매서웠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의 사정은 그때 못지 않다. 일각에선 오히려 더 심하다는 지적도 있다. 그래서 ‘新적폐청산’이라고도 한다.
더불어민주당은 ‘정치보복’을 중단하라고 외치지만 국민의힘은 “자기가 하면 ‘적패청산’이고 우리가 하면 ‘정치보복’이냐”며 '민주당의 내로남불'을 꼬집는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 과거 정부의 정책이나 인사를 뒤집는 경우가 많다. 과거와의 단절이자 새출발을 위한 통과의례 같은 것이다. ‘코드’가 맞는 사람을 전진 배치해 추진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과 자기진영 사람들만 챙기는 회전문 인사라는 비판이 교차한다.
정치권에서 내려온 낙하산 인사를 정권이 바뀌면 물갈이 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으로 볼 수도 있다. 문제는 사정의 칼날이 실무를 담당한 공무원이나 공공기관까지 강도 높게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임원이 정치권에 야합을 해서 자기이익을 챙기거나 잘못했다면 당연히 처벌해야 한다. 하지만 관례처럼 이뤄진 업무처리까지 사법처리를 받게 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장차관실에서 내려온 지시를 거부할 수 있는 공무원은 거의 없다. 담당부처 공무원이 산하기관에 지시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판단이 개입하거나 사적 이해관계가 개입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래서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는 말까지 있다.
그런데 관례처럼 진행된 업무지시를 처리했다가 사정당국의 집중 조사를 받고 사법처리될 위험에 놓이게 된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과거 정부를 겨눈 사정의 칼날이 ‘쉬운’대상인 공무원과 공공기관부터 치고 올라가는 모습이다.
시집살이를 심하게 당한 며느리가 더 못된 시어머니가 된다는 말처럼 ‘적폐청산’을 지켜봤던 새 정부에서 더 서슬퍼런 사정이 진행되고 있다. 이 때문에 “눈치없이 열심히 하다간 정권 바뀌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며 복지부동하는 공무원들이 늘고 있다. 공공기관에서도 공무원들의 지시가 내려오면 반드시 ‘증거’를 남긴 후 업무처리를 하거나 ‘위험’이 있어보이면 아예 움직이려하지 않는다.
‘신적폐청산’이니 ‘검찰공화국’이니 하는 회오리에 선배들이 정치 사정의 희생양이 되거나 복지부동하는 모습을 지켜본 젊은 공무원들은 미련없이 공직을 떠나고 있다.
지금은 국가적 위기상황이다. 경제위기와 코로나 팬데믹을 극복하기 위해 온 국민이 힘을 합쳐도 모자란다. 공직사회는 할 일이 더 많다. 그런데 공무원들이 복지부동하고 있다. 정치적 이익을 위한 과거청산이나 사정을 반복해서는 미래가 없다. 이런 사태를 지켜보면 윤석열 정부가 출범초기 헛발질과 내분을 거듭하며 항로를 잃어버린게 아니냐는 의구심마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