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 2011년 1월 21일, 이역만리에서 날아온 ‘아덴만 여명작전’ 낭보에 온 국민이 환호했다. 해군 청해부대가 소말리아 해적에게 납치됐던 삼호주얼리호 선원 21명 전원을 구출하고, 해적 13명을 사살 및 생포한 것이었다.
1월 15일 07시 30분경(이하 현지시간), 삼호주얼리호는 한국인 8명을 포함한 선원 21명이 승선해 아랍에미리트에서 스리랑카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소말리아 해역 동북쪽으로 2,000여 km 떨어진 인도양 해역에서 소말리아 해적 13명에게 납치됐다. 선원들은 해적들이 삼호주얼리호에 승선하자 선미 창고로 대피해 숨었지만, 결국 3시간여 만에 발각돼 인질이 됐다.
삼호주얼리호 피랍 상황을 보고받은 우리 군은 청해부대 소속 최영함을 급파했다. 해군작전사령부는 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해 청해부대에 전송하고, 인질 구출을 위한 작전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에티오피아 지부티 항에서 긴급 출항한 최영함은 1월 17일, 소말리아 방향으로 기동하고 있는 삼호주얼리호를 레이더로 포착했다. 최영함은 삼호주얼리호 인근에서 해적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거리를 유지하며 작전 개시 시기를 판단했다.
그러나 다음날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일부 해적들이 지나가던 몽골 선박을 추가 납치하기 위해 삼호주얼리호에서 하선한 것이었다. 청해부대는 해적들의 주의가 분산된 틈을 노려 1차 구출 작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대원들은 교전으로 부상을 당했고, 결국 선원들의 안전 문제 등을 고려해 물러서야만 했다. 이후, 청해부대는 작전계획을 보완하며 2차 구출 작전을 준비했다.
1월 21일 04시 58분경, 2차 구출 작전이 단행됐다. 작전명은 ‘아덴만 여명작전’이었다. 05시 29분경, 최영함으로부터 “선원 여러분, 잠시 후 우리 해군이 구조를 위해 공격을 할 것입니다. 안전구역으로 대피하고, 외부로 나오지 마십시오”라는 긴박한 메시지가 삼호주얼리호에 울려 퍼졌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생사기로에 있던 선원들이 무사히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 순간이었다.
10여 분 뒤, 최영함에서 이륙한 링스헬기가 기관총으로 사격을 개시했다. 헬기에 탑승한 저격수도 해적들을 조준해 사살했다. 그 사이 검문검색팀은 고속단정을 타고 삼호주얼리호로 접근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선박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당황한 해적들은 곳곳으로 흩어져 몸을 숨겼다.
삼호주얼리호 접근에 성공한 검문검색팀원들은 승선을 시도했다. 승선 중 자칫 생명이 위험할 수 있었지만, 팀원들은 목숨을 바치겠다는 신념으로 신속하고 과감하게 움직였다. 이후, 삼호주얼리호에 전원 승선한 팀원들은 일사불란하게 기동하며 해적들을 제압했다.
마침내 06시 45분경, “현 시간부로 대한민국 해군이 장악했습니다. 안심하시고 갑판으로 나와주십시오”라는 안내 방송이 선체에 울려 퍼졌고, 피신해 있던 선원들은 안도와 함께 갑판으로 나왔다. 이로써 납치됐던 선원 21명 전원이 구출되고 격실에 숨어 있던 해적까지 모두 생포되며, 아덴만 여명작전은 09시 56분경 성공적으로 종료됐다. 다만, 삼호주얼리호 석해균 선장은 총상을 입어 곧바로 응급 처치를 받고 현지병원으로 이송됐다.
아덴만 여명작전에 대한 외신들의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외신들은 이번 작전을 ‘대담하고도 보기 드문 공격’(AP통신), ‘드라마틱한 구출작전’(LA타임스) 등으로 보도했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인명피해 없이 인질 구출 작전이 성공한 사례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아덴만 여명작전은 해외에 파병된 우리 군이 군사작전을 통해 국민을 구출한 최초의 성공 사례였다. 세계적으로도 피랍된 상선을 군사작전으로 구출한 다섯 번째 사례로 기록됐다. 이 작전으로 우리 군은 한반도를 넘어 세계 어느 곳에서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수 있다는 능력과 의지를 보여줬다.
조우주(前 국방정신전력원 전문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