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 올해 들어서 5월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6,375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5,791명에 비해 584명(10.08%(↑)이나 증가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합계출산율 0.72명으로 꼴찌인데다 자살률 1위까지 안고 있는 우리나라가 더 깊은 수렁으로 한 걸음 더 빠져든 셈이다.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 ‘데이터 ZOOM’의 ‘10년간(2013∼2022년) 자살 현황’을 보면 1일 평균 자살자 수는 35.4명이다. 인구 10만 명당 자살률은 25.2명이나 된다. 2023년 자살한 사람은 1만 3,770명으로 전년도 1만 2,906명보다 864명(6.69%↑)이나 크게 늘면서 올해 1~5월 하루 평균 자살사망자는 41.9명으로 지난해 37.7명보다 4.2명이나 늘어났다. 급기야 정부는 ‘자살위기극복특별위원회’를 운영하고 자살 예방 통합 상담 전화(109)를 가동하는 등 긴급 대책을 마련했다. 그런데도 자살자가 줄기는커녕 올해도 증가가 예상되는 상황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기술적으로 발전된 경제를 가진 나라로 스스로 자평하고 있지만 이면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는 숨길 수가 없다. 우리는 세계 경제 규모 14위에 1인당 국민소득은 4만 달러를 바라보고 있다. 반도체, 자동차, IT산업 등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스마트폰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으며 한국의 대중문화가 세계 시장에 킬러 콘텐츠를 쏟아내고 있다.
한국의 GDP 순위는 2023년 전 세계 14위(1조 7,000억 달러)로 G7 국가 중 영국(3조 3,000억 달러), 프랑스(3조 달러), 이탈리아(2조 3,000억 달러), 캐나다(2조 1,000억 달러) 수준에 근접하고 있다. 한국의 1인당 GDP 순위는 2023년 전 세계 35위(3만 3,192달러)로 한국, 일본, 이탈리아가 모두 3만 달러대에 자리하고 있다. 전 세계 국가 경제력 수준으로 가까운 시간 내 G7에 진입할 가능성이 있는 국가로는 한국, 스페인, 호주뿐이다.
하지만 힘들고 고통스런 삶을 사는 사람이 많다는 지표도 수없이 많다. 대한민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가운데 자살률 1위 국가다. OECD 평균의 4배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고(高)위험 사회다. 2024년의 한국은 믿기조차 어렵게도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어서다. 우선 노인빈곤율과 청소년 자살률, 저출산율, 이혼율, 낙태율, 흡연율, 간암 사망률, 당뇨병 사망률 모두 1위로 치욕적이다.
더구나 학교 교육비 가계 부담률과 대학 학비 민간 부담률, 그리고 여성 흡연율, 청소년 흡연율 모두 1위인 그야말로 삭막한 국가다. 게다가 불평등 지수와 주당 노동시간이 제일 높고 빈부격차, 사교육비 지출, 술 소비량 또한 1위다. 더군다나 양극화는 세계 최고 수준이고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다. 정부는 코로나19 사태 후 사회적 고립과 경제난, 우울·불안 증가 등의 요인이 자살자 수 증가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분석했다.
오늘날 행복은 자본가들에게 포획되어 새로운 이윤 창출 수단으로 전락했고, 개인 간 경쟁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존중 불안’ 즉 ‘무시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나 갑질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극도로 심한 대한민국과 같은 ‘21세기형 불화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내가 타인보다 더 잘났거나 더 잘 산다는 것을 수시로 확인받지 못하면 불안해지는 ‘무시 포비아(Phobia)’를 앓고 있는 듯하다.
위계 간 불화에 위계 내 불화까지 합쳐지고 겹쳐진 최악의 복합 불화가 벌어지는 ‘21세기형 불화’에 의해 ‘풍요불화사회’로 전락하고 있다. 세계 최상위권을 점하고 있는 높은 수준의 경제력, 전 세계가 격찬해 마지않는 뜨거운 교육열과 ‘기대수명 세계 1위’라는 다양한 긍정적 지표가 빛이 바래고 퇴색해 가고 있다. 유엔 산하 자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의 ‘2024년 세계행복보고서(WHR)’에 따르면 세계 1위는 핀란드로 7년 연속 1위를 지키고 있다.
대한민국은 세계 143개국 중 52위이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에서는 35위(2023년)로 최하위 수준이다. 행복의 일반적 정의는 ‘주관적 안녕감’으로서 개인이 느끼는 일상생활의 성공이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덕(Arete)’이 있는 영혼의 활동으로서 지성과 성품의 탁월성으로 공동체 속에서 올바름을 지키는 윤리적 삶으로 봤다. 행복감은 개인의 기본적 성향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지만, 후천적 생활 습관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그만큼 국민이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불만이 많다는 방증(傍證)이다.
너무 흔해서 그런지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뉴스가 있다. 바로 자살이다. 전세 사기 피해자, 악성 민원에 시달리던 공무원과 교사, 생활고에 시달리던 서민,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사는 청소년 등 거의 매일 같이 쏟아지는 자살 소식에 우리는 너무나 무감각하다. 이렇게 무뎌지고 집중력이 떨어지며 무감각한 상태를 ‘브레인 포그(Brain fog │ 머리에 안개가 낀)’ 상태라고 한다. ‘브레인 포그’를 겪는 것은 목까지 차오르는 물속을 걷는 것과 같다고 한다. 만성 스트레스를 겪으면 투쟁과 도피 반응이 계속 켜져 코르티솔(Cortisol)과 아드레날린(Adrenalin) 등의 스트레스 호르몬이 계속 분비되기 때문이다.
정부가 분석한 자살 증가 원인 중 하나가 ‘모방 자살’이었다. 지난해 말 배우 이선균씨의 사망 사건 이후 7~8주간 자살 사망자가 늘었다고 했다. 전문가들도 이선균씨의 비극과 청소년 자살 생중계 등의 여파를 주시한다. 유명인의 죽음이 모방 자살을 부른다는 ‘베르테르 효과’는 과거 배우 최진실씨 사례 등을 통해 확인됐다. 거기에 자살 관련 정보가 SNS 등을 통해 퍼지면서 위험성이 높아져 왔다.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에 따르면 2020년 9만 772건이던 자살 유발정보 신고는 2022년 23만 4,064건으로 급증했다. 특히 자해 사진 및 동영상은 4만 2,850건에서 12만 2,442건으로 폭증했다. 당국의 신속한 심의와 차단이 시급하나 현행 시스템이 도통 따라가지 못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에 내몰리면서 전 연령층이 극도의 정신적 갈등과 부담에 노출된 우리 사회의 특성은 호전될 기미마저 안 보인다. 학생 자살의 경우 2019년 140명에서 2021년 197명으로 늘었다. 가족 간 갈등(22.6%)이나 학업 문제(14.3%)가 주요 원인이었다. 자살 방법을 분석한 결과 청소년의 자살 다수가 충동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실도 나타났다. 사회 내부 스트레스가 극심한 상황에서 무차별적으로 유포되는 자살 관련 정보는 불에 기름을 끼얹는 듯한 결과를 초래한다.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에서 모든 선택은 당연히 극단적일 수밖에 없다.
언론중재위원회는 지난 5월부터 자살 사건 보도 시 제목에 ‘극단적 선택’을 사용하는 경우 시정을 권고하기로 했다. 자살의 완곡한 어법, 그 표현이 되레 자살을 ‘선택 가능한 대안 중 하나’로 인식하게 할 수 있다는 이유여서다. 그 우려에 전적으로 모두를 동의하지는 않는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의 지적처럼 모든 자살이 사회적 타살이라 해도, 벼랑 쪽으로 걸어간 이상 선택의 몫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단 한 명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이 단어의 사용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한국경제(김지홍 기사심사부장)에 의하면‘자살’이란 말을 신문 뉴스에서 금기시한 것은 2004년이라고 한다. 10여 년 뒤 ‘극단적 선택’이 대안으로 등장했다. 본래 자살이란 단어는 한국어에 없었다. ‘자진(自盡)’이나 ‘자결(自決)’을 많이 썼다. 자살은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 선생이 영어 ‘Suicide’를 번역해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진, 자결에 새로운 자살이 그리고 극단적 선택이 더해졌다고 한다.
자살 문제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선진국은 사회의 각 부문이 협력해야만 위기 극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때 자살률이 30명을 넘어섰던 핀란드가 대표적 사례다. 보건뿐 아니라 경찰과 교육, 지역사회 등 관련 당국이 다양한 협업 프로젝트를 추진해 자살률을 절반 이하로 떨어뜨렸다. 한때 자살률 수치가 심각했던 일본은 경찰청과 후생노동성이 관련 자료를 긴밀하게 공유하면서 실효성 있는 대책을 마련했다.
무엇보다 허물어진 공동체 복원이 절실하다. ‘우리 함께’라는 연대 의식이 ‘나만 홀로’라는 개인 의식으로 변해버린 이 야속하고 무정한 세상에서 나의 외로움을 표현하고 내 주변 사람들의 아픔에 같은 관심과 공감을 보이는 공동체 의식에서 시작할 수 있다. 세대가 변한 것이 아니라 시대가 변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미래에 더 큰 희망을 걸지 않게 되었을 때 자신의 처지에 만족한다지만 그것이 지나쳐 비관하고 자학하며 지치고 시달린 번아웃(Burnout)에 삶의 의지를 잃고 막막해 세상이 무너져 포기할 때 누군가의 품고 보듬는 포용과 배려가 필요하다. 서로 고민을 털어 놓고 답답한 마음을 열어 놓을 조그마한 ‘곁’을 만들어 오직 한 번뿐인 생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
‘주4일제 네트워크’에 따르면 한국의 연간근로시간은 1,901시간이나 된다. OECD 평균 1,752시간보다 약 149시간이나 많고,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 평균 1,571시간보다 약 330시간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 특히 48시간 이상 장시간 노동은 17%나 차지한다. 연차휴가는 평균 8.6일 사용하여 소진율은 66.1%에 불과하다. 그만큼 격무(激務)와 싸우고 있고 그만큼 휴식이 부족하다는 방증(傍證)이다.
검색에 밀려 사색이 없는 시대를 살면서 일상사 늘 서러워 흔들거리면서도 이 세상 무성한 잡초 속에서 비비고 얼굴 내민 여린 풀꽃 한 송이였던 아련한 슬픔을 지닌 채로 외롭게 서 있을지라도 쉼이 있고 휴식이 있는 힐링과 재충전이 있는 치유와 회복이 있는 내일을 놓아선 결단코 안 된다. ‘위기(危機)’는 ‘위대(偉大)한 기회(機會)의 줄임말’인 ‘위기(偉機)’이기 때문이다.
박근종 작가·칼럼니스트(성북구도시관리공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