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6대 임금, 단종 장릉(莊陵) 단종비 정순왕후 사릉(思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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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6대 임금, 단종 장릉(莊陵) 단종비 정순왕후 사릉(思陵)
  • 김종혁 기자
  • 승인 2016.07.16 13: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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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함께 만나지 못하는 왕과 왕비, 단종과 정순왕후
강원도 영월 단종 장릉

[매일일보] 조선 제6대 임금 단종(1452~1455)의 묘 장릉(莊陵)은  강원도 영월에 모셔져 있다. 12살 어린 나이에 임금 자리에 올라 3년 뒤 숙부 수양대군에 의해 강월도 영월땅으로 유배된 단종.

아버지 문종이 재위 2년만에 승하하자 어린나이로 왕위에 오른 단종은 숙부, 훗날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다. 질곡 많은 어린 임금과의 인연으로 오랜 세월  왕과 함께 울었던 강원도 영월에 장릉이 있다.

이후 조선 중종 때 부터 단종의 제사와 무덤에 대한 의견이 나오면서 선조대에 이르러 상석, 표석, 망주석이 세워졌다.

단종 장릉 정자각

숙종 24년, 1698년에 노산군에서 단종으로 복위되어 장릉으로 이름했다.  이후 한 참 세월이 흘러 1970년에 사적 제196호로 지정됐고 다른 조선왕릉과 함께 2009년 6월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 됐다.

현대에 이르러 드라마와 영화속 주제로 등장하면서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아는 "단종애사"의 주인공, 영월 장릉에 위치한 유적지에 가면 단종유배길과 이와 관련된 사료들을 볼 수 있다.

단종장릉 역사관.  단종 유배길등 자료를 전시 하고있다  .영월 장릉 소재

 

제6대 단종 비 정순왕후 사릉(思陵)

단종비 정순왕후 사릉 능침 사진=문화재청

능의 구성

사릉은 조선 6대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의 능이다. 정순왕후 송씨는 군(君)부인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처음에는 대군부인의 예로 묘소를 조성했다.

그 후 1698년(숙종 24년)에 정순왕후로 복위돼 묘소를 능제에 맞게 다시 조성했다. 능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했고 석양과 석호를 하나씩 줄였으며, 무인석을 생략했다. 문인석과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은 정종의 후릉(厚陵)의 능제에 따라 작게 조성했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정자각, 비각을 설치했고, 드물게 예감 뚜껑(덮개)이 남아 있다. 정자각은 다른 왕릉에 비해 아담한 모습이고, 정자각으로 연결되는 향로와 어로는 중간에 끊어져 있다.

사릉은 문화재청이 관할하는 궁과 능에 필요한 나무를 기르는 '양묘사업소 묘포장'이 있어서 많은 전통 수종의 식물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능의 역사

정순왕후 송씨는 1521년(중종 16년)에 군(君)부인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의 시댁인 해주 정씨의 선산(양주 군장리)에 조성해 복위 전까지 해주 정씨 집안에서 제사를 지냈다. 1698년(숙종 24년)에 정순왕후로 복위돼 신주를 종묘에 모셨고,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했다.

사릉 곡장(둘레 담) 전경

정순왕후(定順王后) 이야기

정순왕후 송씨(1440~1521)는 본관이 여산인 여량부원군 송현수와 여흥부부인 민씨의 딸로 1440년(세종 22년)에 전북 정읍 태인에서 태어났다.

단종 즉위 이듬해인 1454년에 타고난 성품과 검소의 미덕을 인정받아 왕비로 책봉됐다.

다음 해인 1455년에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선위하고 상왕이 되자 의덕왕대비로 책봉됐다.

1457년(세조 3년)에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나면서 사육신을 비롯한 단종 측근세력들이 제거되자,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되고, 정순왕후는 군부인으로 강등되어 현재의 동대문 밖 정업원에서 생활했다.

날마다 정업원 뒤쪽 산봉우리 동망봉에 올라 영월땅을 바라보며 비통한 마음으로 단종을 그리워하다 1521년(중종 16년)에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릉 정자각

정순왕후는 15세에 왕비가 되었다가 18세에 단종과 이별하고, 군부인으로 강등되어 평생을 혼자 살아가야했던 불운한 인물로 왕후의 비극에 얽힌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단종은 1457년(세조 3)에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도 복위사건으로 인해 영월로 유배되어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됐다.

이 소식을 들은 정순왕후는 아침저녁으로 산봉우리에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동쪽을 향해 통곡을 했는데, 곡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렸으며 온 마을 여인들이 땅을 한 번 치고 가슴을 한 번 치는 동정곡을 했다고 전한다.

그 뒤부터 이 봉우리는 왕후가 동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하여 동망봉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한편, '한경지략'에 의하면 영도교 부근에 부녀자들만 드나드는 금남의 채소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왕후를 동정한 부녀자들이 끼니 때 마다 왕후에게 채소를 가져다주다가 궁에서 말리자 왕후가 거처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장을 열어 주변을 혼잡하게 하고, 계속해서 몰래 왕후에게 채소를 전해주려는 여인들의 꾀에서 비롯됐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자료출처=문화재청,공공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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