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家 안방마님 故 변중석 여사, 몸뻬바지 입는 ‘재벌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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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家 안방마님 故 변중석 여사, 몸뻬바지 입는 ‘재벌부인’
  • 류세나 기자
  • 승인 2007.08.24 16: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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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그림자 내조한 故 변 여사, “내 재산은 재봉틀 한 대와 장항아리 뿐”

정재석 전 부총리 “근면검소하고 겸허한 삶을 사신 분”…“일생을 헌신과 희생으로 살다 간 우리시대 진정한 어머니상”
故 정 명예회장 “부자라는 인식 없는 아내가 존경스럽다”

▲ 故 변중석 여사
‘재벌총수의 아내’. 단 한마디지만, 그 안에는 세상 사람들이 안간힘을 다해 좇고 있는 ‘부와 명예’가 모두 담겨있다. 또 ‘재벌총수의 아내’는 일부 사람들이 그토록 되고 싶어 하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화려한 수식어와 달리 늘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과 몸뻬바지를 즐겨 입었던 현대家의 어머니 故 변중석 여사.                                                                                                                                                             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못먹고 못살던’ 시절을 딛고, 뚝심과 도전정신으로 대기업을 일궈낼 수 있었던 데는 재벌가 안주인답지 않게 평생을 검소하게 살아온 변 여사의 조용한 내조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게 주변의 한결같은 평이다. 정 명예회장이 한국경제를 일으킨 거목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해왔던 고인은 남편을 떠나보낸 지 6년 반 만에 그의 곁에 영원히 잠들게 됐다.

현대家 안방마님 떠나는 길 ‘인산인해’


뇌세포의 특정부위가 파괴되면서 운동장애는 물론 기억력 상실, 사고능력 마비 등의 장애를 겪어온 현대그룹의 안방마님 故 변중석 여사. 그녀는 1990년 협심증으로 병원에 입원한 이후 고혈압, 심장병 등의 지병이 악화되면서, 지난 8월 17일 향년 86세를 일기로 긴 투병생활의 종지부와 함께 생을 마감했다. 고인은 지난 21일 경기도 하남 창우리 선영에 남편인 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곁에 안장됐다.


17일 오전, 병원측의 급한 연락을 받고 달려온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2남), 정몽근 현대백화점 명예회장(3남), 정몽준 국회의원(6남),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7남) 등 대부분의 유족들은 이날 한자리에 모여 고인의 임종을 지켜봤다.


故 정몽헌 회장의 부인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임종을 지켜보는데 가슴이 너무 아팠다”며 “결혼하기가 무섭게 시어머니가 한약을 지어 오시고, 손수 만든 명주 속치마도 한아름 들고 오셨었다. 며느리들에게 너무 잘해주셨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는 현대가 대모의 장례답게 5일장 내내 정계, 재계, 문화계, 스포츠계 할 것 없이 국내외 5천여명 저명인사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빈소의 한가운데는 노무현 대통령이 보내온 조화로 장식됐으며, 애도의 뜻으로 전달된 조화의 수만 해도 5백여개에 달했다. 또 병원 입구에서부터 장례식장 앞까지 줄줄이 이어져있는 고급승용차들의 행렬은 현대그룹의 위상을 대변해주는 듯했다.

▲ 지난 21일 오전 경기도 하남시 창우리 선영, 유족들이 영정을 앞세우고 장지로 오르고 있다.
재벌부인의 전 재산은 재봉틀 한 대?


줄줄이 이어지는 각계각층의 조문객들과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빈소의 풍경과 달리 고인의 평소 품행은 말 그대로 ‘검소’했다.


‘재벌총수의 아내’하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손 하나 까딱하기 싫어하고, 자신의 외관 꾸미기에만 열중한다거나, 해외 명품브랜드, 보석, 호화저택 등을 수집할 것 같은 이미지와 달리 고인은 평생 자신의 재산이라고는 故 정주영 명예회장이 6.25 직후 선물한 재봉틀 뿐 이라고 여길 정도로 한결같은 근검함과 겸허함 속에서 살았다.


정 명예회장은 살아생전에 늘 입버릇처럼 “아내가 재봉틀 한대를 유일한 재산으로 아는 점, 부자라는 인식이 전혀 없는 점들을 존경한다”고 말해온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다. 또 “아내는 패물하나 가진 적 없고, 알뜰하게 간수하는 것은 재봉틀 한 대와 장독대의 장항아리들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1921년 금강산과 인접해 있는 강원도 통천에서 9남매의 맏딸로 태어난 故 변 여사는 같은 고향마을 출신인 故 정 명예회장와의 혼담이 오간지 1달 만에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의 나이 16세 때의 일로 정 명예회장이 변 여사보다 6살 연상이었다.


결혼 후 그녀는 평생 슬하의 8남 1녀 자식을 길러내고, 다섯 시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해오며 일생을 보냈다. 또 생전에 매일 오전 5시 모든 식구와 함께 아침식사를 하던 정 명예회장을 위해 매일같이 새벽 3시에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던 그녀였다.


남편의 사업이 날로 번창해 ‘재벌’ 소리를 듣기에 이르렀지만, 그녀는 결혼 전과 마찬가지로 검소한 생활을 이어갔다. 회사 구내식당에서 주방 일을 돕고, 메주를 직접 쑤어 비서실 직원들에게 돌리기도 했다.


며느리들에게도 시골 아낙 같은 넉넉함으로 감싸며 대접 받으려 하지 않고, 따뜻한 정으로 내리사랑을 보여줬으며 조심스러운 행동과 겸손을 잊지 말 것을 항상 일렀다는 것이 주변 얘기다.

▲ 80년대 서울 청운동 자택에 함께 모인 가족. (가운데 줄 왼쪽에서 네번 째 고 정 명예회장, 다섯번 째 고 변중석 여사)

변 여사는 시장에 갈 때도 남편인 정 명예회장이 사준 자동차는 부담스럽다며 집에 모셔만 두고, 대가족이 함께 먹을 수 있는 만큼의 채소와 잡화를 사서 가겟집 용달차에 싣고 집으로 돌아올 만큼 재벌가 마님 같지 않은 모습을 보여 왔다. 또 집에서는 언제나 몸뻬바지 차림이어서 집에 찾아온 손님들이 변 여사를 일하는 아주머니로 착각하기 일쑤였다.

▲ 70년대 중반 속리산에서 정주영 명예회장과 부인 변중석 여사의 다정했던 모습. 당시 정 명예회장은 건설에 이어 자동차·조선·시멘트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정 명예회장은 자서전인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와 <이 땅에 태어나서> 등을 통해 “늘 통바지 차림에 무뚝뚝하지만 60년을 한결같이, 평생 변함없는 점들을 존경한다. 존경하고 인정할 점이 없다면 사랑도 할 수 없다”며 아내에 대한 사랑을 드러냈다.


또 “나는 아내생일, 결혼기념일도 평생 모르고 산 사람이다. 아내는 여태껏 불평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면서 “평생 불만거리 하나 내색하지 않고 집안을 꾸려준 내자가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고마울 수 없다”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지금의 현대그룹은 故 변 여사의 ‘조용한 내조’ 덕

▲ 1985년 정주영 명예회장의 고희 피로연에서 부부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

고인은 재벌 총수의 아내라는 주목받는 자리와 달리 평생 한결같은 근검함과 겸허함,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조용한 내조와 자식교육으로 ‘현모양처’의 표본이라는 주변의 평가를 받아왔다.


故 정 명예회장은 생전의 저서들을 통해 “아내를 보면서 가장 ‘현명한 내조’는 ‘조용한 내조’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여러 차례 밝힌바 있는데, 이는 고인의 묵묵한 내조가 있었기에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나가며, 지금의 현대그룹을 이룩할 수 있었다고 간접적으로 밝힌 부분이다.


지난 21일 서울아산병원에서 진행된 영결식에서 정재석 전 경제부총리는 추모사를 통해 “故 변 여사의 배려와 묵묵한 내조가 있었기에 故 정 명예회장이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신화를 창조할 수 있었다. 일생을 헌신과 희생으로 살다 간 우리 시대 진정한 어머니상”이라며 “대기업 회장의 아내라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자리에 있었지만 근면검소하고 겸허한 삶을 사신 분”이라고 평했다.


이어 정 전 부총리는 “모두가 가난하고 어렵게 살던 시절, 청운동 자택의 대문을 세상을 향해 항상 활짝 열어 두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찾아오는 걸인들도 따뜻하게 맞이해 배불리 먹여 보내신 후덕한 심성을 지닌 분이셨다”고 고인을 기렸다.


정 전 부총리는 고인의 시동생인 故 정신영씨의 지기로, 학창시절 정주영 명예회장의 자택에서 숙식을 함께 해 변 여사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을 갔던 정 명예회장 일가가 정 전 부총리의 집에 머물렀던 인연도 갖고 있다.

▲ 젊은 시절 정주영 명예회장과 변중석 여사의 모습.

평소 고인과 친자매 같은 정을 나눠왔던 김재순 수녀는 “변 여사는 평생 화장을 하지 않아도 누구보다 환하게 빛나던 얼굴이었다”며 고인을 회상했다. 김 수녀는 “특히 집을 찾아온 우체부에게 따뜻한 점심을 대접하고, 고생하는 시장 사람들을 위해 물건 값을 깎으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사님이 시장에 가시면 시장사람들이 무척 반가워하고, 고마워했습니다”고 말하며 고인과의 헤어짐을 안타까워했다.


또 “아침마다 물을 길어다 주는 남편을 보며 행복해 했다는 말씀을 생각하면, 여사님의 소박한 마음이 새삼 가슴에 사무친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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