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중학교 계약직 영어강사 ‘스트레스성 유산’ 파문 전말
[매일일보=변주리 기자] 우리 사회에서 아직까지 해결되지 못한 여성의 사회 진출과 저출산 문제, 그리고 비정규직 문제를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청주의 한 중학교 영어강사가 학교 측의 계약기간 축소 요구에 스트레스를 받아 유산을 하게 된 것. 도교육청은 “대체 강사를 운영하면 학생들이 혼란스러워 할 것을 우려한 것 뿐”이라며 강요는 없었다고 해명했지만, 당장 비슷한 사례를 겪었거나 겪고 있는 비정규직 강사들은 이번 사건으로 저출산 문제의 원인과 비정규직의 어려운 현실을 되돌아 봐야한다며 분노했다.
특히 피해를 입은 해당 강사는 이러한 일들이 비단 개인적인 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며 또 다른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계약 만료 앞두고 임신 소식에 출산휴가 두려워 6개월만 계약 종용
도교육청에 민원제기하자 한 시간 동안 붙잡고 불편한 심기 드러내
“재계약 못할까 쉬쉬… 비정규직이 사람 대접받을 수 있는 날 왔으면”
“출산휴가 안 돼? 이 나라의 미래 생각하고 있는지 한심하기 짝 없어”
‘한국 초중등 영어회화 전문강사 협의회(이하 협의회)’에 따르면 지난달 29일 충북의 ‘ㅅ’중학교에서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던 A강사가 계약 만료를 앞두고 해당 학교 교장과 재계약을 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아 유산을 한 사건이 발생했다.
A강사는 2009년 8월 해당 학교와 1년 단위로 첫 계약을 한 이후 2010년에도 재계약을 했으며, 올해에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 재계약을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A강사의 임신사실을 알게 된 ‘ㅅ’중학교의 교장은 A강사가 출산휴가를 쓸 것을 우려해 6개월 계약을 요구했다.
교장의 요구에 부당함을 느낀 A강사는 충북도교육청에 정당한 절차를 통해 민원을 제기했지만,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교장은 A강사를 불러 한 시간이 넘도록 민원 제기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6개월 계약을 종용했다. 이에 A강사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8주에 접어든 태아를 유산했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해 도교육청의 한 관계자는 한 매체를 통해 “출산휴가로 대체 강사를 운영하면 학생들이 혼란스러워 할 것을 걱정한 학교장이 6개월 계약을 권유하고 조율했을 뿐 특별한 압력은 없었다”고 해명했다.
“개인적인 문제만이 아냐”
하지만 당사자인 A강사의 설명은 다르다. A강사는 병원으로부터 유산 소식을 들은 직후 협의회 게시판에 올린 글을 통해 “말을 돌려서 이것저것 했지만 결론은 민원까지 올린 저랑 계속 일하기가 껄끄럽다, 생각을 바꾸라는 말이 결론이었다”며 “결국 출산휴가 3개월 때문에 학교가 손해 보니 양보하라는 말”이라고 억울함을 토로했다.
A강사는 “이야기 내내 약자의 입장이자 계약직에 비정규직의 설움만 느낀 것 같다”며 “출산휴가는 편람에도 이미 나와 있고 그건(1년 계약 요구) 2년간 이 학교에 몸담은 당연한 제 권리”라고 주장했다.
A강사는 또 “요즘 같은 저출산 시대에 학교라는 곳이 앞장서서 공평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이렇게 필요할 때 쓰다가 학교 운영상 손해가 갈 것 같으니 ‘교육 공무원의 입장에서 좀 더 효율적인 결론을 내린다’는 자기중심적인 발언에 정말 실망스럽고 이런 곳에 하루라도 더 일하기 싫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비정규직이나 계약직이 현재 우리나라 고용시장의 68.7 % 차지한다고 한다”며 “이건 당장 나만이 처한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제 주변의 가족들, 미래의 우리의 아이들까지도 처할 수 있는 문제”라고 꼬집었다.
아울러 그는 “아가를 지켜 주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정말 당연한 권리 가지고 이렇게 정신적 고통을 받는 제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진다”며 “저와 같은 일로 또 다른 누군가가 마음 아파하고 고통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A강사의 글을 접한 협의회 회원들은 그가 겪은 일에 함께 공감하며 분노를 드러냈다.
자신도 임신 중임을 밝힌 한 회원은 “하루하루 몸은 고된데 재계약에 걸려 기쁜 맘으로 학교에 말하지 못하고 숨어 지내듯이 지내고 있다”며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는 이어 “저도 아이가 어떻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겁난다”며 “이 나라의 비정규직이 사람 대접받을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다른 회원은 “작년에 제 친구도 영어회화 전문 강사로 일하다가 임신을 했는데, 당시 그 친구가 다니던 학교의 교장선생님은 평가 점수를 조작해서라도 재계약할 수 없다고 말했다”며 “그 친구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 재계약을 포기하고 지난 5월에 출산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학교는 이후에 채용한 영어회화 전문 강사를 비롯해 기간제 교원들에게 근무시 결혼 및 임신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았다고 한다”며 “정말 이 나라가 나라의 미래를 생각이나 하고 있는 건지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말했다.
“명백한 사회적 범죄이자 살인 행위”
이번 사건과 관련해 영어회화 전문 강사들을 대변하는 협의회는 보도자료를 통해 “천인공노할 일이 국가의 백년대계를 책임지는 교육현장에서 벌어졌다”며 “이 사건은 국가정책에도 반하는 명백한 사회적 범죄이고 살인행위”라고 비판했다.
협의회는 해당 학교의 교장이 6개월 계약을 종용한 것에 대해 “지금 현재 정부와 여·야를 막론한 정치권이 사회적으로 심각한 비정규직에 대한 대책을 쏟아내고 있는 가운데 엄연히 업무편람에 있는 출산휴가에 대한 규정조차도 무시했다”며 “1년 계약을 6개월 계약으로 전환하려는 꼼수를 부린 교장을 강력히 규탄한다”고 밝혔다.
협의회는 또 “국가에서 심각한 저출산의 시대에 출산장려 정책을 펴고 있는 가운데 임신, 출산을 이유로 사회적 활동을 막으려고 했던 행위 또한 그냥 지나칠 수 없다”며 “게다가 임산부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줘 유산에 이르게 한 이번 사건은 명백한 살인사건으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협의회는 이 같은 사건이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이 학교장 계약 문제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 사건을 계기로 교육과학기술부도 수수방관했던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이 사건의 해결에 앞장서야 함은 물론,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학교장 계약을 시도교육청 계약으로 전환하여 다시는 이런 불행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행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42조에 따르면 영어회화전문강사를 비롯한 학교내 비정규직은 학교장과 계약하도록 되어있다.
협의회는 또 충북교육감에게는 출산휴가, 유아휴직을 적극 보장하고 학교장의 부당한 재계약거부에 대해서는 강력한 조치를 취해줄 것을, 학교장에게는 해당 강사에게 진심어린 사과와 위로의 마음을 전달하고 어떠한 책임도 지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힐 것을 요구했다.
“비슷한 사례, 수도 없이 많아”
사건이 발생한 이후 논란이 일자, 문제가 된 학교장은 A강사에게 사과의 뜻을 밝혔다.
협의회 관계자에 따르면 해당 협의회 측은 학교장과 교감 및 행정실장, 충북교육청의 장학사와 최근 만나 의사 조정을 거쳤으며, 학교장은 1일 A강사에게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런 일이 발생한 것에 대해 가슴이 아프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사과했다.
A강사가 유산을 한 사실에 대해 심리적 부담을 느끼고 병원 치료를 받았다는 학교장은 또 “이번 사건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며 “사태에 대한 책임을 다하겠다”는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충북도 장학사와 학교 측은 이번 사건에 대한 조치로 A강사와 1년 계약을 맺기로 했으며, 유산 등으로 심리적·신체적 고통을 겪고 있을 것을 감안해 2달 범위 내에서 병가 휴가를 주어 심신을 회복하도록 결정했다.
또한 충북도교육청 측은 협의회의 출산 휴가와 유아휴직을 적극 보장해 달라는 요구 사항에 대해 충북도교육감과 간담회를 추진하기로 했다.
이에 대해 A강사는 학교장의 사과를 받기 전까지 법적 소송이나 행정적 중징계를 원했지만, 학교장이 정년을 1년밖에 남겨두지 않은데다 2년 동안 같이 근무해 온 것에 대한 온정을 베풀어 사과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에 대해서도 A강사는 “물질적 보상을 받는 것 자체가 아이와 바꾸는 것 같아 심리적으로 부담이 된다”며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협의회 관계자는 “A강사가 유산된 것 때문에 이번 사건이 알려지게 됐지만, 사실 학교 현장에서 비정규 강사에게 부당한 요구를 해온 비슷한 사례들은 수도 없이 많다”며 “법과 제도로는 보장되어 있지만 현실 속에서는 그것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이번 사건이 또 다시 발생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며 “학교장 계약으로 규정된 현재의 제도가 하루 빨리 변경돼야 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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