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 시화공단 태국인 노동자 ‘동포 살해’ 내막
살해당한 피해자 S씨, 불법체류자 출신이라 유가족 찾기조차 힘들어
피의자 T씨 “죽었을 거라곤 생각 못했다”…혐의는 인정, 진술은 번복
이달 초 이천화재참사로 외국인 노동자 수십 명이 귀한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이 우리 머릿속에서 채 잊혀 지기도 전에 또 한명의 태국인 노동자가 유명을 달리했다. 한국엔 아무런 연고도, 핏줄도 없었다. 고통 받으며 죽어가도 옆에서 울어줄 사람 하나 없었다. 지난 25일로 세상을 떠난 지 5일이 지났지만 고향에 있는 가족들은 그의 죽음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 ‘코리아드림’을 꿈꾸며 찾아온 한국땅에서 꿈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죽어간 사연을 따라 가봤다.
조금 더 윤택하고, 조금 더 풍족한 삶을 살기 위해 사랑하는 가족들과 생이별을 감수하고 한국으로 건너온 태국인 노동자 S씨(38 ∙ 남). ‘조금만 고생하자’는 생각으로, ‘내가 조금 더 고생하면 가족들은 그만큼 더 편안해 지겠지’라는 생각으로 택했을 한국행. 그러나 그가 한국에 머물기 시작한지 약 2년여가 지난 지금, S씨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죽.었.다’는 얘기다.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생활했기에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도 별로 없다. 현재로서 S씨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그의 국적과 이름, 나이, 지난 2005년경 한국으로 왔다는 정도 뿐이다. 또 그의 방에서 발견된 한 여성과 아이와 함께 찍은 사진으로 미루어 기혼자라고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사건을 조사한 시흥경찰서 강력3팀 관계자에 따르면 태국대사관이 그의 가족들을 수소문 하고 있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말만이 돌아왔다고 한다. S씨의 사망일로부터 5일이 지난 지금까지 가족들은 그가 죽었을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지도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해서 사망에 이르게 된 것일까.
“해코지 할까 두려워 공격했다”
경기도 시흥시 시화공단에서 공장일을 하며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던 S씨. 지난 19일 밤, S씨는 공단 내 A마트 한켠에 마련된 노래방에서 동료 10여명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며 회포를 풀고 있었다. 공장 내에 입지해 있는 마트의 특성상 주고객은 외국인 노동자다. 마트 주인부부 역시 한국인 남성과 귀화한 태국인 여성이다. 이들 부부는 공장이 시내와 떨어져 있어 마트 내에 식료품과 청과물 뿐 아니라 작은 식당과 함께 노래방 기계를 들여놓았다. 2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방 안에 2개의 테이블과 함께 설치돼 있는 노래방은 공단에서 근무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유일한 ‘오락거리’였다. 때문에 노래방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러나 노래방 기계는 한대였기 때문에 일행이 아닌 사람들과 합석하는 것은 그곳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S씨 역시 동료들과 함께 이곳을 자주 찾았고, 그 날 역시 다른 일행과 합석을 했다. 두 팀은 모두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노랫가락에 흥이 돋아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장소가 협소한 탓도 있지만 20여명의 장정들이 일어나서 춤을 추다보니 상대편 일행들과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두 팀은 서로 ‘우리 노는 데 너희들이 방해를 한다’며 언성을 높였다. 냉랭한 분위기 속에 S씨는 T씨(27∙ 남)에게 “어려보이는 놈이 어디 어른에게 말대꾸를 하냐”는 뉘앙스의 말을 내뱉었고, 두 사람간의 한랭전선은 그 뒤로도 지속됐다. 그 때 T씨의 동료가 노래방 문을 열고 “T씨의 친구가 마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며 T씨를 불러냈고, S씨는 T씨의 뒤를 따라 나갔다. 밖으로 나왔으나 T씨의 친구는 보이지 않았다. 친구가 있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친구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T씨는 자신을 따라 나온 S씨에게 더욱 위협을 느꼈다. 자신을 해코지 할 것 만 같았다. 그렇게 T씨는 자신의 주머니에 있던 과도로 S씨를 찔렀다. 경찰이 밝힌 T씨는 처음 진술은 이렇다. T씨는 노래방을 나오다가 뒤따라오는 S씨에게 위협을 느껴 마트 내에 있는 칼을 집어 들고 나왔다고. 그러나 이후 T씨는 1차로 기숙사에서 술을 마신 뒤 밤에 밖으로 나간다는 불안감에 방에 있던 과도를 챙겨 나왔다고 진술을 번복했다.신발에 떨어진 혈흔으로 용의자 검거
경찰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T씨는 S씨의 배꼽 3~4cm 위 복부를 한차례 찌르고 기숙사로 도망갔다. T씨 진술에 의하면 S씨가 죽었을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고 한다. 살인을 저질렀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T씨는 술기운에 기숙사에 들어가자마자 잠이 들었다. 그렇다면 경찰은 피의자 T씨를 어떻게 검거했을까.같은 날인 19일 밤 11시 반, A마트 앞. 마트 여주인은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S씨를 보고 놀라 “사람이 죽었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를 들은 노래방에 있던 두 팀 일행들은 부리나케 도망갔다. 모두 불법체류자 신분이었기에 사건에 휘말리면 한국에서 쫓겨나게 되기 때문이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마트주인의 진술을 토대로 수사를 진행했다. 아무리 공장단지가 넓다고 해도, 늘 보아왔던 손님이기에 어느 공장에서 일을 하고, 어느 숙소에서 머무는 지 대강 알고 있었던 것. 마트주인에 따르면 당시 마트 내에는 20여명의 외국인 노동자가 있었다. 경찰은 태국출신 마트여주인과 함께 당시에 현장에 있던 공장근로자들의 숙소를 수색했고, 피의자 T씨의 슬리퍼에서 혈흔으로 보이는 핏자국을 발견했다. 경찰은 동행한 마트여주인의 도움을 받아 T씨와 대화를 시도했으나 T씨는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경찰에 연행된 T씨는 결국 경찰 조사중 자신의 혐의를 인정했고, 시흥경찰서는 지난 20일 T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25일 현재까지도 구속수사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 지난 2005년 1월, 3개월 비자를 갖고 한국으로 온 T씨 역시 불법체류를 하며 시흥시 시화공단에서 돈을 벌고 있는 노동자였다. 술기운에 우발적으로 저지른 한 순간의 실수로 두 외국인 노동자의 ‘코리안 드림’은 물거품으로 사라지게 됐다.한편 S씨는 119구조대의 도움으로 인근 시화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송 직후 숨졌다.저작권자 © 매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