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클럽 가수 꿈꿨으나 윤락녀 삶 강요당한 대한민국 기지촌 내 필리핀 여성들
“고국 돌아가고 싶지만 가족 먹여 살리려고 참고 일한다” 고백
할당량 못 채우면 벌금에 성매매까지…그래도 임금은 월 40만원
[매일일보닷컴] 한국전쟁 이후 약 50여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사회는 ‘눈부시게’ 성장했다.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 놀라운 경제 성장률을 보였고, 88년도에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을 정도의 국가경쟁력을 갖췄다. 작금에 들어서는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중화권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한류붐을 일으키는 등 우리나라는 비약적인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지난 세월동안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에도 많은 변화가 왔다. 한국여성들은 더 이상 미군들을 상대로 성(性)을 팔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지촌에서 한국 여성들이 떠난 뒤에도 미군은 끊임없이 젊은 여성들의 ‘몸’을 원했고, 한국여성들의 빈자리를 메운 것은 바로 필리핀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소위 ‘양공주’라 불리던 한국인 성매매여성의 자리를 대신해 기지촌 성산업 구조에 편입되고 있었다. <매일일보>이 각자 가슴 속 사연을 안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기지촌 여성들을 삶을 취재했다.
“필리핀에서는 늘 빚에 쪼들려 힘든 삶을 살았어요. 일곱식구의 장녀였던 저는 가족들을 부양해야했기에 외국에 나갈 결심을 하게 됐죠. 정직하게 돈을 벌어 우리가족이 마음 편히 함께 지낼 수 있는 집 하나를 장만하고 싶다는 마음 뿐 이었어요.” 그렇게 찾아온 한국이었다. 그러나 필리핀 여성 A씨의 꿈은 한국에 발을 내딛는 순간 깨지고 말았다. 지난 2004년 10월 미군클럽 가수로 한국에 들어온 A씨는 엔터테인먼트 업체에 많은 돈을 지불하고 한국정부로부터 합법적인 연예흥행비자(E-6)를 발급받았다. ‘정직하게’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란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1년을 일해도 2달치 월급밖에 받을 수 없는 노예생활이었다. 원하던 가수로서의 삶도 아니었다. 새벽 5시까지 감금상태로 일해야 하는 지옥 같은 윤락녀 생활이었다. A씨는 음료수(일명 주스)와 술 판매액을 할당받고, 이를 채우지 못하면 벌금을 물어야했다. 성매매를 강요당하기도 했다.“동두천의 한 미군클럽에서 처음 일하게 됐어요. 첫 날 방글라데시에서 온 남자들이 클럽에서 놀고 있었는데 그건 함께 노는 게 아니라 완전히 성추행이었어요. 그들은 내가 자신들 무릎 위에 앉아 성기를 잡고 진한 키스를 하기 전까지 주스를 사주지 않았어요.”이후 그녀는 다른 클럽으로 옮기게 됐지만 그 곳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였다. A씨는 주스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선 여러 남자에게 몸을 맡길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게다가 함께 일하는 여성들 사이에서 경쟁은 치열했다. 모두 매달 자신이 팔아야할 주스 할당량이 정해져 있었는데 이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한국에서의 일자리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A씨는 이런 까닭에 출입국관리소에 신고를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럴 경우 곧바로 강제추방 당하게 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당초 가수활동을 할 것으로 E-6 비자를 발급받았던 것인데 목적과 다른 접대부로서 활동한 것이 드러나면 곧바로 비자 효력이 정지되기 때문이다. A씨는 “당장에라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렇지만 고향에서 어렵게 사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한국을 뜰 수가 없다”고 하소연하며 눈시울을 붉혔다.“주스 못 팔면 성매매라도 해라”
미군 기지촌 부근 여성들의 인권착취 실태를 보고 이 여성들을 돕기 시작한 ‘두레방(여성 인권운동단체)’은 지난해 5월부터 다섯 달에 걸쳐 경기도 평택 ‘K-55’(오산 비행장) 앞 클럽들을 현장 조사했다. 그리고 같은해 12월 이 같은 내용이 담긴 ‘2007년도 경기도 외국인 성매매 피해여성 실태조사’를 발표했다. 기지촌 여성들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필리핀 여성 45명의 설문조사와 그 중 17명과의 심층 인터뷰로 이뤄진 이 보고서에 따르면 이 여성들의 83.7%가 클럽 내에서 성매매가 이뤄지고 있다고 응답했다. 본지가 입수한 보고서의 면면은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여성들은 한 달에 200잔에서 많게는 500잔(클럽에 따라 할당량이 다름)에 이르는 주스할당을 채워야 했다. 말이 500잔이지 평일에 클럽을 찾는 고객이 많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금요일이나 토요일 등 손님이 많은 날을 이용해 할당량을 채워야 한다.“생리중일 때도 2차 내보내”
그렇다면 이들은 자신들이 한국에서 하게 될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일까. 대답은 ‘10% 정도만이 알고 있었다’는 것. 물론 한국 기지촌에서 일하다가 자국으로 돌아가는 외국인 여성들도 있다. 또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 하더라도 가족들과 연락을 하면서 지낸 경우도 있다. 그런데 여성들 사이에서 한국의 E-6 비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두레방 박수미 간사는 이에 대해 “E-6 비자를 받아 한국으로 오는 외국인 여성들 대부분이 한국에서 가수로 활동하게 되는 것으로 알고 온다. 미군의 여흥을 돋구는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여성은 많지 않다”며 “자국으로 들어가도 외국인 여성들은 본인들이 한국에서 무엇을 해서 돈을 벌었는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 여성들은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 또한 원하지 않는다. 박 간사는 “클럽에서 웃음을 팔고, 몸을 팔더라도 외국인 여성들은 한국에서의 일을 감수하려고 한다”면서 “돈을 벌려는 목적으로 한국에 온 그녀들에게는 현실적인 문제보다 경제적인 문제가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한달 월급이 30만원에서 50만원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 정도면 필리핀에서는 엄청난 액수”라고 전했다. 게다가 클럽에서는 여성들에게 여러 명이 공동으로 생활하는 숙소까지 제공한다. 따로 숙박비를 들이지 않고서도 생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식사까지 해결해주는 곳도 있지만 월 10만원 정도의 식비를 받는 곳도 있다. 박 간사에 따르면 숙식비를 따로 많이 들이지 않고도 자국대비 큰 액수를 돈을 벌 수 있는 ‘한국의 미군클럽’은 가난한 국가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꽤 괜찮은 조건이라는 것이다. 실태보고서에 따르면 기지촌에서 일하고 있는 필리핀 여성들 대부분의 경우 고국으로 돌아가겠냐는 질문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고향으로 돌아가도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고 이곳에서 번 돈이 가족들에게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EL(가명. 29세)씨는 필리핀에 두 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그녀는 비자도 만기가 다 되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도 없는 처지지만 아직은 고국으로 돌아갈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가고 싶지만 필리핀에서 번 돈으로는 두 아이를 키우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법체류 기간이 길어져서 출입국관리소에 내야할 벌금이 많은 그녀는 지금 당장 돌아가고 싶어도 이제는 불어난 벌금 때문에 쉽사리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울 수도 없는 상황이다. 기지촌의 외국인 여성들은 연예인 자격으로 입국했으나 그들이 하게 되는 일은 결코 연예인으로서의 일이 아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기지촌 내 외국인 여성들은 더 이상 자신과 같은 예로 다른 여성들이 한국에 오지 않기를 희망한다. 고국의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한국에서 보낸 생활을 이야기 할 수 없지만 절대 한국행을 추천하지 않겠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저작권자 © 매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