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권 공격 세력에 유리한 수단으로 전락 우려
“경영권 방어 비용 막고 본업에 집중토록 해야”
매일일보 = 김명현 기자 | 기업 지배구조에 대한 규제 강화 움직임에 재계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기업의 과감한 경영 판단을 지연시키고 투기 자본의 경영권 공격을 유발해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
30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현재 22대 국회에는 상법 개정안, 상장회사지배구조법 제정안 등 19개의 지배구조 규제강화 법안이 계류돼 있다.
재계 주요 경제단체들이 모두 한목소리로 깊은 우려를 표하고 있는 이유다. 글로벌 불확실성이 가중하는 상황에서 기업 지원에 총력을 기울이는 주요 선진국들의 행보와 대조된다는 지적이다.
구체적으로 재계는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 확대 및 이사에 공정의무 부과 등을 골자로 하는 상법 개정안에 근심이 큰 상황이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중점 발의한 이 법안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 확대하자는 게 주된 내용이다. 일반 주주의 이익을 강화한다는 취지이며,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 지배주주의 전횡을 방지하는 '제도적 장치'란 명분이 부여됐다.
하지만 입법화할 경우 정상적인 기업활동이 불가능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재계 시각이다. 이사회의 경영 판단에 대해 일부 주주들이 '충실의무 위반'을 앞세워 이사를 배임죄로 고발하는 건수가 늘어날 것이란 관측이다. 이는 기업의 신사업 진출과 대규모 설비투자 등 주요 결정이 어려워지는 구조로 고착화될 수 있다.
재계는 집중투표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에도 반대하는 입장이다. 집중투표제는 1주당 뽑을 수 있는 이사 수만큼 한 명의 이사에게 표를 몰아줄 수 있는 제도다. 감사위원 분리선출은 대주주가 뽑은 이사 중에 감사위원을 선출하지 않고, 별도의 감사위원을 선출하는 제도다. 이들 제도 역시 소액주주 영향력을 높여준다는 취지로 발의됐다.
그러나 재계는 차등 의결권이나 경영권 방어장치 없이 집중투표제 의무화 등이 시행될 경우 기업의 부담 증가, 자율성 훼손 등으로 결국 정부의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정책에 반하는 밸류 다운이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지배구조 규제 법안들을 관통하는 우려 포인트는 '지배구조 약화'다. 투기 자본에 의한 경영권 공격이 기승을 부리고 국부유출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 확대 등을 포함한 상법 개정안은 글로벌 행동주의 펀드들에 우리 기업을 공격할 수 있도록 빌미를 쥐여주는 것"이라며 "행동주의 캠페인 활성화와 성공 가능성이 크게 증가해 경영권 방어가 매우 어려워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 몇 년간 국내 기업을 대상으로 한 행동주의 펀드의 캠페인 활동은 최근 이어진 지배구조 규제 정책의 강화와 함께 가파르게 증가해 왔다.
영국 데이터 분석기관 인사이티아에 따르면 행동주의 펀드의 목표가 된 한국 기업의 수는 2017년 3곳에 불과했지만 2019년 8곳, 2023년 77곳으로 최근 5년 새 9.6배 급증했다. 앞서 2003년 외국계 행동주의펀드 소버린이 SK를 공격해 최태원 회장 퇴진 등을 요구한 후 약 1조원의 단기 차익을 거두고 철수한 사례도 있다.
이상호 한국경제인협회 경제산업본부장은 "기업가치를 본질적으로 제고하기 위해선 기업이 경영권 방어에 천문학적 비용을 낭비하는 것을 막고 투자, 고용 등 본업에 집중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정부는 상법 개정에 신중히 접근하는 모습이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17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를 규정하는 상법 개정에 대해 "정부가 여러 내용을 검토 중"이라며 "전체 상법 체계를 좀 봐야 하는 내용도 있고, 한국 경영 현실상 과도한 배임 처벌 우려 등도 있다는 점에 대해 깊이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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