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감 조성된 틈 탄 ‘공권력 강화’ 시나리오
치안부재∙부실 초동수사 등 정부책임 물타기
[매일일보=류세나 기자] 최근 벌어진 강호순 사건을 계기로 사형제 존폐 논란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한나라당은 지난 12일 법무부, 경찰청 등과 당정회의를 갖고 “사형집행이 필요하다는 국민 여론이 높다”며 사형제 부활의 필요성을 전달했다. 반면 국내외 인권단체들은 “우리나라의 인권을 역행시키는 행위”라며 반발하고 있다. 심지어 “정부는 여론에 조성된 공포감을 악용해 치안, 안전 이라는 미명아래 국가의 감시와 공권력 강화를 정당화 시키려하고 있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지난 18일 오후 서울대학교 공익인권법센터·한국사형폐지운동협의회 등이 주최한 ‘사형제 폐지를 위한 긴급 토론회’가 열린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2 강당에 사형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중 일부분인 사형집행 장면이 상영됐다. 영화에서 사형수 정윤수(강동원 분)는 형이 집행되기 직전, 눈물을 쏟아내며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전한다. 그동안 도와준 이들에 대한 감사, 피해자와 그 유가족에 대한 사죄, 남겨질 사랑하는 이에 대한 미안함 등등. 눈물 섞인 윤수의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머리에 흰 두건이 씌워지고 목에는 밧줄이 걸린다. 이 장면에서 윤수의 지인은 물론 교도관들도 형이 집행되는 과정을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린다. 또 집행관 역시 버튼을 누르지 못하는 등 망설임을 보인다. 죄의 대가라지만 한 생명을 죽여야만 하는 ‘정당한 살인’에 대한 고통을 표현한 대목일 것.“보복성 사형제보다 효과적 수사 시스템이 먼저”
우리나라에서 마지막으로 사형이 집행된 때는 김영삼 정부 말기인 97년 12월 30일이다. 이후 2009년 현재까지 12년간 사형이 집행되지 않은 우리나라는 2007년 12월 30일 국제사회가 인정한 ‘실질적 사형 폐지국’이 됐다. 하지만 이 기간 동안에도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언도받은 사형수들은 존재했다. 지난 2004년 무고한 시민 13명을 살해한 정남규, 2006년 21명의 부녀자를 유린한 유영철, 그리고 올해는 7명의 부녀자를 연쇄살인하고 넷째부인과 장모를 방화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강호순이 사형을 언도받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2월 현재 우리나라의 사형수는 58명이다. 이들은 모두 사람을 살해한 혐의로 최고형을 선고 받았으며, 범행수법 또한 매우 잔인했다는 게 특징이다. 하지만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인권단체들은 “대부분의 사형수들이 죄를 뉘우치고, 변화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며 “보복성을 띠고 있는 사형집행은 교정의 최선책이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였다.특히 유영철 사건의 피해자 유족 중 몇몇은 사형제 폐지 운동을 돕고 있기도 하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고정원(67∙남)씨는 지난 2003년 10월 유영철의 손에 노모(당시 85)와 부인(당시 60), 4대 독자(당시 35) 등 세 명의 가족을 한꺼번에 잃었다. “지금 이곳은 토론 열기로 가득 차 있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춥다”는 말로 운을 뗀 고씨는 온풍기가 돌아가고 있는 실내에서 3시간 넘도록 이어진 토론회 내내 목에 두르고 있던 까만색 목도리를 풀지 않았다.
“가족들을 잃은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조용한 곳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싶어 청와대 근처인 종로구 구기동으로 이사를 한 것이었는데…. 그곳으로 이사 가자고 하지만 않았더라도 우리 가족은 죽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유영철을 죽인다고 해서 내 가족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또 다른 생명 하나가 죽음을 맞게 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유씨를 용서하기로 마음먹고 사형폐지운동에 동참하게 됐다. 용서를 하고 나니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지만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 (가족들의 죽음은) ‘내 탓’이라는 생각 때문에 아직도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이와 관련 서강대 법대 이호중 교수는 “최근 극악무도한 범행을 방지하기 위해 사형집행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 사형이 꼭 필요한지 그리고 효과적인 대책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감정적인 분노의 차원에서 성급하게 결정할 일이 아니”라며 “오히려 범죄를 저지르면 곧바로 검거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사∙검거 시스템을 갖추는 게 더욱 현명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가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던 98년부터 2007년까지의 10년간 살인범죄의 건수는 1998년 966건에서 2007년 1,124건으로 16.3% 증가했다. 반면 사형제가 시행되던 이전 10년(88년~97년)까지 발생한 살인사건은 601건에서 789건으로 31% 증가했다. 사형집행이 흉악 범죄를 예방할 수 있다는 주장은 통계적으로도 입증되지 않은 허구일 뿐이라는 것.그들이 안전의 대가로 요구한 것은?
“정부 권력유지 수단으로 여론 호도 안 돼”
실제 정부는 ‘법질서 강화’ ‘치안’ 등을 내세우며 감시 및 통제 권한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경찰은 범죄예방에 대한 대책으로 CCTV 확대 설치, 검문검색 강화, 중범죄자 얼굴공개, 유전자 정보활용을 위한 유전자법 등에 관한 법률 제정의 뜻을 밝혔다. 또 한나라당은 감형이나 사면이 불가능한 ‘절대적 종신형제’ 도입과 강력범죄자 신상공개 등을 법제화하겠다고 공포했다. 이와 동시에 실질적 폐지상태였던 사형제 부활에 대한 논란의 불씨를 지폈다. 국민의 안전을 위해 사실상 범죄자의 인권, 생명권 등에 대한 가치는 포기하겠다는 것. 이와 관련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은 1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사형제도 이대로 좋은가’라는 주제로 열린 토론회에서 “최근 강호순 사건이 발생하자 정부와 여당은 사형조기집행, 인권유린 정책 등을 펼치려 하고 있다”면서 “이는 치안불안에 떨고 있는 국민 여론을 빌미로 감정적이고도 시대착오적 통치방식”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