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준(土美) 도시로 재생연구소 소장] 도시 속에서 지금은 자연이 희귀하지만, 태초에 자연이었던 곳에 도시가 뿌리를 내렸다. 도시에서의 사람들은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규칙을 만들었다.
도시와 자연이 각각 이유있는 공존(共存)과 공생(共生)을 하고 있다. 공존은 함께 생존하고 존재하는 그 자체를 의미한다. 공생은 서로 다른 두 광물이 서로에게 이익관계가 얽혀 함께 사는 일로, 한 개체군에는 이익이 있지만 다른 개체군에 이익이 없는 편리공생과 일방적인 이익만을 얻는 기생관계도 있다. 이익을 주고 받는 관계와 일방적으로 이익을 취한다는 점이 공생의 두가지 면이다.
도시는 인간에게 편리함과 빠른 속도를 만들어냈지만 자연이 주는 것만큼의 정서적인 충족감과 원초적 생명력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도시는 늘 자연을 갈구한다. 불편함을 감수해야했던 숲에 케이블카를 연결하고 바다 중간에 인공브릿지를 건설하며 주택과 호텔을 짓는다. 이젠 청정한 바닷가 근처에서도 스타벅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광경을 종종 볼수 있게 됐다.
대도시의 상징적 역할을 하는 것에도 자연적인 특징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공동주택을 계획하고 홍보하는 단계에서도 자연적인 입지와 환경을 늘 언급한다.
도시와 자연은 서로에게 필요한 관계인가, 일방적인 기생관계인가. 도시 자체로 생존할 수 없으므로 도시는 결국 자연에 기생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도시 자체로 생태계를 갖지만 도시는 일방적으로 자연에 기생하고 지구에 의존한다. 그 정점에는 개발, 발전, 욕망 등이 응축돼 있다. 그 모든 행위가 ‘인간의 행복’이라는 전제에서 이뤄졌고 앞으로도 그래야 하지만, 도시의 개발행위는 개발단계의 수익 분석에 많은 초점이 맞춰져 있다.
최근의 개발지역을 방문할 때 좀 더 신경쓰이는 부분은 자연의 영향력이 닿는 도시의 경계부분이다. 숲과 도시의 경계, 바다와 도시의 경계, 강과 도시의 경계, 산책길과 도시의 경계. 언제부턴가 도시는 이 자연과의 경계, 초근접적인 거리와 혜택을 자본가에게 내주고 있다.
과거 특정계층의 경마장과 골프장으로 사용됐던 서울숲은 공원이 된 이후 공간은 시민에게 내줬지만 공원뷰(view)를 온전히 모든 사람들에게 내주지 않는다. 한민족의 젖줄이라고 하는 서울의 한강뷰는 이미 럭셔리 주택의 대명사가 된지 오래다. 세계적인 해변휴양도시로 알려진 미국 하와이, 그리스 미코노스, 이태리 나폴리, 호주 골드코스트, 싱가폴 센토사섬 등에서 보듯이 세계의 부호들이 선호하는 비치프론트 레지던스 역시 특정계층의 휴양과 고급레지던스의 기준이 되고 있다. 부산의 대표적인 바닷가에도 100층이 넘는 타워가 들어서면서 바다와 상업시설, 교통이 가미된 복합리조트의 개발의 그림이 완성돼 가는 중이다.
욕망과 기술은 서로 협력하고 자연을 멋지게 포장해 시장에 내놓지만 어디까지가 사람을 위한 기술인지 때로는 의심스럽다. 누구에게나 개방돼 있었던 예전의 자연환경과 특정계층이 좀 더 잘 즐길 수 있게 된 자연의 의미가 다르게 다가오는 것은, 앞으로 우리가 도시 속의 자연을 이해하고 관리하는데 대한 의식의 변화가 ‘수익’에만 고정되지 않을까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도시는 사람들의 진보를 위해 생겨났지만 그 힘은 자연으로부터 얻는다는 것을 사람들은 개발의 한계에 부딪히면 알게된다. 시크하고 치열한 속도의 도시와 천천히 멈추라는 자연의 공존은 어떤 선까지 연결하고 상생·공존할 것인지 자연의 본연의 가치를 다시금 생각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