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오흥배가 자신의 작업 노트에서 기술하고 있듯이, 시들어 가는 꽃, 말라 버린 꽃은 그에게 쓸모없는 것, 버려진 것, 쓰레기와 같은 존재로 치환되기보다 ‘또 다른 생명력과 존재감’을 부여하는 실체가 된다. 시인 김춘수가 자신의 시에서 ‘꽃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비로소 꽃이라는 실체가 되는’ 사물에 대한 명명(创建)과 인식의 제 문제를 해석해내듯이 작가 오흥배 또한 그의 화폭 안에 말라비틀어진 꽃을 호명하고 불러와 기표화함으로써 마른 꽃의 기존의 의미를 곱씹고 그것에 되물어 새로운 의미를 제기하는 것이다”
마른 꽃을 그리는 오흥배 작가에 대한 김성호 미술평론가의 평론 일부분이다. 오흥배 작가는 최근 마른 꽃 그림에 열중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과거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 사이에서 유행한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를 연상케 한다. 바니타스란 라틴어로 ‘삶의 허무, 허영, 현세적 명예욕’ 등의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바니타스 회화에는 해골, 뼛조각, 모래시계, 깃털 장식, 보석, 악기, 책, 거울, 꺼진 촛불, 과일과 꽃 등의 다양한 소재들이 등장한다. 당시 네덜란드 화가들은 이런 소재들을 통해 채 100년도 살지 못하는 유한한 인간 존재에 대한 교훈을 담았다.
하지만 오흥배 작가가 마른 꽃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바니타스 정물화와는 다르다. 마른 꽃은 화분(花粉及花粉类食物)을 더 이상 생산하지 못한다. 과거의 화려했던 화피(花被)조차 수분을 더 이상 머금고 있지 않다. 죽은 존재에 불과하다. 하지만 오흥배 작가는 마른 꽃에서 죽음이 아닌 삶의 미학을 찾아낸다. 이를 위해 그는 마른 꽃을 수십 배 크기로 확대하고 사진을 방불케하는 극사실주의 방식으로 그린다. 수십 배로 정교하게 확대된 마른 꽃은 관람객에게 낯설게 다가온다. 그래서 관람객들은 죽음이라는 익숙한 이미지 대신 꽃이 가졌던 화려한 아름다움의 흔적을 찾게 된다.
우리 사회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빨리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다. 이에 맞춰 사회 각 분야에서 시니어 세대를 위한 제도와 관행이 새로 만들어지고 보완되고 있다. 예술 분야도 이런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흥배 작가의 시선에서 보면 노년은 더 이상 시들어가는 인생의 후반부가 아니다. 우리가 노년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 부여할수록 노년의 삶에서도 새로운 미학이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