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함∙세탁시설까지 완비 “하룻밤에 4천원”
한 방에 수십명씩 동침해도 “쪽방보다 저렴”
장기거주 인원도 수십 명…‘식구’되면 할인도
PC방 등 인력시장 기능도 병행해 ‘일석이조’
[매일일보=류세나 기자] 서울역 앞 만화방을 찾는 사람 중에는 ‘만화를 보러오는’ 사람이 없다. 열차시각을 맞추기 위해 시간을 때우러 오는 사람도 없다. 그렇다면 하루에도 수십 명씩 그곳을 드나드는 이들은 무슨 목적으로 만화방을 기웃거리고 있는 것일까. 아무렇게나 꾸겨 신은 낡은 운동화 차림에 목에는 수건, 손에는 칫솔을 들고 만화방을 곳곳을 익숙한 발걸음으로 돌아다니고 있던 중년 남성들에게 ‘만화방’은 보금자리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래도 발 뻗고 잘 수 있고 세탁까지 할 수 있는 만화방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주요역 근처의 PC방 상황 역시 준노숙인들의 아지트가 된 지 이미 오래다.
“어떻게든 돈을 모아 편히 지냈으면 하는 생각도 들지만 지금 상태론 불가능한 희망사항일 뿐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아내나 딸에게 너무 미안해서 연락도 못하고 있는데…. 지금 내가 당장 죽어도 내 아무도 모르겠지요. 만나지는 못해도 멀리 떨어져 있는 건 싫어서 가족들이 사는 집 근처 PC방에서 지내고 있는데, 가족들은 그것조차 몰라요.”
현재 충남 대전의 한 PC방에 둥지를 틀고 지내고 있는 A(남∙52)씨의 이야기다. 그는 PC방 안에서 밥도 해결하고, 잠도 잔다. 컴퓨터를 할 수 있도록 놓아둔 고객용 의자가 A씨에게는 집이자 침대인 셈이다. 그가 처음 PC방에서 생활하게 된 것은 2002년이다. 당시 A씨는 건설회사 하청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본청이 부도가 나 40억 원에 달하는 공사비를 받지 못해 큰 빚을 지게 됐다고 한다.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몽땅 처분해도 여전히 남아있는 수십억의 빚 때문에 아내와도 이혼을 한 A씨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PC방을 전전하는 생활을 해왔다. A씨는 하루 평균 2끼 정도를 먹는데 PC방에서 라면으로 때우는 게 보통이고 돈이 있을 경우에도 가족들 눈에 띌까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PC방으로 음식을 배달시켜 먹는다. 그래도 다행히 약 두 달 전부터는 일용직 야간 택배일을 하고 있어 그나마 상황이 나아진 편이다. PC방으로 인력사무소 직원이 일할 사람을 찾으러 와서 오랜만에 일거리를 구할 수 있었다.장기투숙자에겐 사물함 사용의 영광을?
전문가와 A씨 같은 준노숙인들에 따르면 만화방, PC방 등에서 인력공급이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대구노숙인상담지원센터 현시웅 소장은 “주요역 주변 PC방과 만화방 등은 준노숙인의 주거지인 동시에 인력시장이다”라며 “인력업체 사람들이 PC방 등으로 찾아와 이들에게 일감을 제공하고 사용자와 근로자에게 소개료를 받는 형식”이라고 말했다. 현 소장은 이어 “이 같은 특수성 때문에 준노숙인들은 오래전부터 역 주변 PC방이나 만화방 등에서 생활해오고 있다”고 덧붙였다.2층에는 두개의 방이 있는데 첫번째 방은 짧게는 3년에서 길게는 8년까지 그곳에서 고정적으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고, 다른 방은 하루 이틀 정도 머무는 사람들이 이용하도록 하고 있다. 또 3층은 마루바닥으로 된 수면실로, 누워서 잘 수 있는 공간과 샤워와 세탁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식구’의 특권(?)…할인∙외상
지난 3월말 한국빈곤문제연구소가 서울, 대전, 대구에서 고시원, PC방, 만화방 등 비거주용 시설을 주거지로 삼고 생활하는 준노숙인 120명을 임의 표집해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들이 지난 1월 한 달간 노동을 한 일수는 2∼5일이 29.2%로 가장 많았고, ‘단 하루도 일하지 못한’ 사람도 23.3%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교적 값싼 PC방이나 만화방 등에서 지낼 비용도 마련하기에 충분하지 않은 것.이와 관련 ㅊ만화방 업주는 “오랫동안 이곳에서 생활해 온 ‘식구’인 경우 외상을 해주곤 하는데 최근엔 경기가 좋지 않아 대부분 외상으로 지내고 있다”며 “식구들이 일을 하게 되면 우선적으로 외상값부터 지불해주니까 이들의 신용을 믿고 장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서울역, 영등포, 대구, 부산 등 전국 각지에 노숙 또는 준노숙인 등의 ‘홈리스’(Homeless)가 퍼져있다. 지난 2월 한국교회봉사단이 발표한 ‘2009 노숙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국 노숙인 규모는 쉼터 보호 노숙인 3,875명, 거리 노숙인 1,588명 등 총 5,463명으로 파악됐다. 노숙인에 대한 최초의 전국적인 조사였지만 이 같은 수치는 정확하지 않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거리 노숙인 통계의 경우 주요지역에서만 조사가 이뤄졌고, 또 조사당시 현장에 있던 노숙인들의 숫자만 파악된 것이므로 부정확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게다가 이 결과에는 PC방, 찜질방, 만화방 등에서 살고 있는 준노숙인의 숫자는 반영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 한국빈곤문제연구소 류정순 소장은 “이들 준노숙인들이야말로 우리사회의 최하위 계층”이라고 힘주어 말하며 “정부는 이들을 위한 저렴한 소형주택 공급을 늘리고 직업훈련, 취업알선, 공공근로 등의 사업을 더욱 활성화시켜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