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 라디오에서 “채영이가 좋아하는 랜덤 게임, 랜덤 게임”이라는, 구호와 랩의 중간 같은 앳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연이어 ‘아파트’라는 콩글리시도 반복해서 터져 나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파트와 관련된 신규 광고인 줄로만 알았다.
왜냐하면 그 방송은 아침 7시부터 9시까지 오로지 팝송만 틀어주는 채널이었기 때문이다. 노래가 끝난 뒤에 디제이의 설명으로 로제와 브루노 마스가 콜라보한 신곡이라는 걸 알고는 혼자 껄껄 웃었다.
노래는 그야말로 귀에 쏙쏙 꽂혔다. 광고송이었다면 그 아파트는 대박이 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윤수일의 아파트가 더 친숙한 세대인 내 귀에도 통통 튀는 매력이 장난이 아니었다. 아침에 딱 한 번 들은 것뿐인데도 오전 내내 자꾸 떠올라서 혼잣말처럼 아파트를 연호했다.
느끼는 건 다 똑같은지 저녁부터 유튜브가 로제와 브루노 마스의 아파트 소식에 들끓었다. 발매한 지 며칠 만에 전 세계의 각종 음원 차트를 싹쓸이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외국인은 절대 알아듣지 못한다는, 아파트먼트의 콩글리쉬 아파트를 떼창하는 해외 영상은 절로 미소를 퍼올리게 했다. 자랑스러웠다. 마치 로제가 올림픽 월드 팝 부분에 출전해 금메달을 획득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동안 로제가 블랙핑크 멤버 중 하나라는 단편적인 사실만 알고 있던 나는 갑자기 궁금한 게 많아졌다. 신나서 찾아본 뒤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게 됐다. 로제(박채영)가 한국인이지만 뉴질랜드와 호주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과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로 관객의 심장을 쥐락펴락할 만큼 비성 섞인 애절한 음색을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지난해 올린 시드니 브이로그의 조회수가 다시금 눈에 띄게 늘고 있다는 것. 같은 시기에 올린 제니의 시드니 영상보다 무려 두 배 이상 높았다.
나는 로제의 시드니 브이로그를 몇 번씩 돌려 봤다. 시드니에 대한 극과 극의 추억 때문이다.
처음 간 건 수년 전 겨울이었는데 대형 여행사의 프리미엄 상품 브랜드에서 발행하는 매거진의 콘텐츠를 채우는 일을 하러 간 거라 다소 부담스런 여정이었다. 그래도 나름 알차고 설레게 즐기다 올 수는 있었으나 문제는 갑님의 동행이었다.
그는 겉으론 쿨한 척 굴었지만 사이사이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이 갑이라는 걸 증명해 내고야 마는 쉽지 않은 인물이었다. 이래저래 속이 많이 상했고 하루빨리 시드니를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서인가, 그때의 시드니는 기억하고 싶은 것도 별로 없다.
두 번째 시드니 여행은 올여름이다. 호주로 이민을 간 고등학교 때 절친 데비의 집에 놀러 가 꽤 오래 머무른 것인데 지금까지도 그 여운이 남아 있을 정도로 좋았다. 신랑도 내내 기분이 몽글몽글해지고 떠날 땐 눈물이 난 최초의 여행이었다고 회상했다.
시드니에서 남편과 함께 회사를 운영하는 내 친구는 출근하는 길에 우리를 시드니 페리 선착장에 데려다주곤 했다. 비싼 시드니 물가를 고려해 교통카드도 꽉꽉 채워 만들어 주었고, 틈틈히 커피와 간식 도시락도 싸주었다.
우리는 출근하는 현지인들처럼 텀블러를 들고 하루는 달링 포인트, 그 다음날은 더블베이, 맨리, 로즈베이 등에서 내려 시드니 곳곳을 여유롭게 즐겼다. 데비가 싸준 간식으로 점심을 때우고 그 돈을 아껴 근사한 저녁을 먹기도 했다. 휴가를 낸 데비와 함께 떠난 키아마, 울런공에서도 살갑고 다정한 로컬의 시간을 제대로 즐겼다.
이날, 로제의 신곡 ‘아파트’에 홀려 그녀의 철 지난 브이로그까지 다시 돌려본 된 뒤 내가 다시금 스스로 내린 결론은 “여행은 누구와 같이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는 평범한 진리였다. 노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브루노 마스가 로제와 함께해서 그리된 건지, 거꾸로 로제가 브루노 마스에게 기운을 보태준 건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서로를 알아보고 서로의 의견에 귀 기울이며 여행하듯 신나게 만든 노래라는 건 누구라도 짐작이 가능하지 않은가. 틀림없이 그 선하고 밝고 싱그러운 기운이 흘러넘쳐 전 세계의 귀를 홀린 것이리라.
오늘도 나는 로제의 ‘아파트’를 들으며 올여름에 다녀온 시드니 여행 사진을 본다. 노래도 사진도 내겐 둘 다 귀한 선물상자 같다. 듣고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그냥 막 좋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