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이 하얗게 타버린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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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이 하얗게 타버린 기분이었다”
  • 매일일보
  • 승인 2008.07.28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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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의경 "촛불진압 '끔찍' 병역 거부"…시민들 '결정 존중…힘내라' 격려

사진=뉴시스
촛불집회 진압작전에 동원됐던 한 의경이 특박을 나온 후 귀대를 거부한 채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서울 중랑경찰서 방범순찰대 소속 이길준 이경(25)은 27일 오후 7시께 서울 양천구 신월동성당에서 '전의경제도 폐지를 위한 연대'가 마련한 기자회견을 통해 "진압작전에 동원될 때도, 시민들의 야유와 항의를 받을 때에도 아무 말 못하고 명령에 따라야 하는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며 "제 인간성이 하얗게 타버리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2월 의경에 자원입대한 이길준 이경은 "기본적으로 징병제에 회의적인 입장이었지만, 저나 사회를 위해 의미 있는 일에 복무하고 싶었고 고민 끝에 선택한 길은 의무경찰이었다"며 "의경으로 있는 동안 제가 느낀 건, 언제고 우리는 권력에 의해 원치 않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방패를 들고 시민들 앞에 설 때, 폭력을 가하게 될 때 감히 명령을 거부할 생각을 못하고 제게 주어지는 상처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며 "근무시간이 늘어나고 육체적으로 고통이 따르는 건 감수할 수 있었지만 제가 하는 일이 대체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인가를 생각하면 더 괴로웠다"고 말했다. 이길준 이경은 "이번 기회는 제 삶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힘들고 괴로운 일이 많겠지만 주변에서 흔히 걱정하는 것처럼 전 스스로를 어지러운 정국의 희생양이나 순교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분위기를 탄 영웅이 되고 싶은 건 생각도 없다"고 말했다.이어 "단지 스스로에게 인정될 수 있고, 타인과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는 평범한 삶을 살고 싶을 뿐이고, 그런 스스로의 욕망에 충실할 뿐"이라며 "저항의 과정은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이날 남색 의경복 상의를 입고 나온 이길준 이경은 기자회견 도중 "나는 저항한다"라고 외치며 병역거부를 선언하는 상징적인 퍼포먼스를 가졌다. 이길준 이경은 이덕우 변호사와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등과 함께 성당에서 무기한 농성에 돌입했다. 경찰은 기자회견이 열린 신월동성당에 수사관을 통해 체포를 시도했지만 나승구 주임신부의 퇴거 요구로 성당 밖으로 물러나 대기하다가 철수했다.
서울경찰청 관계자는 "빨리 복귀해야하지 않겠냐"며 귀대를 재촉했다. 또 다른 경찰 관계자는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 아직까지 정해진 게 없다"고 말했다. 촛불집회 진압작전에 동원됐던 한 의경이 특박을 나와 귀대를 거부한 채 사실상 병역거부를 선언하자 촛불 시위대가 '지킴이'로 나섰다. 이미 몇몇 주부들과 인근에 사는 주민들은 이길준 이경을 위해 각종 과일과 돗자리, 방석 200여개 등을 후원했다. 새벽을 훌쩍 넘긴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신월동성당에는 60여명의 시민들이 성당 곳곳을 촛불로 지키고 있었다. 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거나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일부 시민들은 더위 탓에 냉녹차와 생수 등을 준비해 나눠마셨다. 농성기간동안 이길준 이경을 돕고 있는 임재성씨(28.대학원생)는 "5월, 6월, 7월 내내 이길준 이경이 고민을 많이 했다"며 "특히 5월31일 집회에 투입된 이후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다"고 말했다. 임씨는 "중랑경찰서장이 성당을 잠깐 다녀갔는데 '경찰을 들여보내진 않을 테니 이길준이 성당에서 안 움직였으면 좋겠다'고 얘기하고 갔다"고 귀띔해줬다. 청계광장에서 촛불집회를 마치고 성당으로 향한 이상현씨(45)는 "조그만 보탬이 되기 위해 나왔다"며 "자기 의지와 어긋나는 부분이 있어서 손을 들 수 있다면 대단한 양심이다.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생각과 의지가 있자면 우리가 지켜줘야 한다"고 말했다. 인터넷을 통해 소식을 듣고 온 강모씨(29)는 "뒤에서 든든한 지원자들이 있으니깐 너무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험한 앞길에 빛이라도 비춰주고 싶은 심정"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김옥선씨(30.여)는 "여자들은 대부분 군대라는 제도에 대해서 밖에서 듣는 것 밖에 모른다"면서도 "국가권력 아래에서 조직을 박차고 나온 것은 굉장히 힘든 결정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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