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기 ‘승자의 저주’ 걸린 기업들… 무리한 차입인수로 재매각 진통까지
[매일일보=이광용 기자] ‘승자의 저주.’ 대규모 인수합병(M&A)이 기업에 악재로 돌변하는 상황을 빗댄 표현이다.
경제위기 파고가 높아지면서 M&A로 덩치를 불린 대기업들이 자금난으로 위험에 노출되는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M&A 경쟁에서는 승리했지만 인수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느라 부채가 대부분 증가한데다 조직통합, 영업권 상각 등의 문제가 맞물려 진통을 겪는 기업들이 적지 않다.
우량기업을 인수하고도 이를 다시 시장에 내놓아야 하거나 계열사나 자산을 매각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M&A로 손해를 보는 기업들도 있다.
M&A로 인한 후유증, 즉 승자의 저주는 적정가격에 매물을 인수했는지 여부에 따라 갈리는 것으로 분석된다. 적정가보다 비싸게 샀다면 재무적 투자자나 차입 등의 무리한 인수대금 마련책이 등장하는데, 최악의 경우 인수기업에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처럼 업종을 가리지 않고 불황이 찾아오고 경제상황 전체가 M&A에 악영향을 끼친다면 기업으로서는 우량 계열사를 팔아치워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대형 M&A 성공 불구 차입금 부담에 잇따른 악재 직면
대우조선 인수 한화 자금조달 난항… 돌파구 마련 주목
금호·유진·이랜드·두산 등 M&A 승자들 자산매각 ‘진통’
대우조선해양 인수 우선협상 대상자인 한화그룹은 매각 주간사인 산업은행과 인수자금 납부 방안을 놓고 팽팽한 입장차를 보이고 있다.
한화는 이에 따라 산은에 6조원으로 추정되는 인수대금을 분할 납부하는 방안도 타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금융기관들이 출자를 꺼림에 따라 내년 3월로 다가온 인수대금의 납부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고 있다. 최근 신조선가가 떨어지고 신규수주가 감소하면서 조선업계가 호황의 정점을 지나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것도 한화로서는 부담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 9일 돌파구가 마련됐다. 산은이 한화에 그룹 자산을 매입하겠다는 제안을 함에 따라 매각 작업이 다시 속도를 낼지 주목을 받고 있다.
산은은 한화그룹의 자산을 매입한 뒤 3~5년 뒤에 팔았을 때 차익이 생기면 이를 돌려주는 방안까지 검토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양해각서 내용을 변경해야 하는 분할 납부 요구는 수용할 수 없으며, 이번 제안이 거부되면 이행보증금을 몰취하겠다고 밝혔다.
따라서 공은 이제 한화 쪽으로 넘어갔다. 숨통은 트였지만 최근 제값에 팔 수 없는 자산을 헐값에 내놓고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부담은 안게 됐다.
업계에서는 한화가 인수가격 조정폭을 3%에서 5%로 확대하거나 자금차입을 주선해 달라고 산은에 요청할 가능성도 있지만 산은이 수용할지는 미지수다.
대우건설에 이어 대한통운까지 삼키며 몸집 불리기에 나선 금호아시아나그룹도 지난해부터 후유증에 시달려 왔다. 대규모 자금을 동원해 대형 M&A의 주인공으로 우뚝 섰지만 시장의 우려와 의심을 받아왔다.
대우건설은 지난해 9월 기준 순차입금이 2조3천억원을 넘었다. 대한통운 인수자금을 분담했기 때문에 재무부담 리스크를 안게 됐다. 이에 따라 대우건설의 장기신용등급은 지난달 ‘A-’로 떨어졌다.
아시아나항공도 대한통운 인수 분담금으로 1조3970억원을 냈다. 현금흐름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자금을 외부차입과 교환사채(EB)로 충당해 재무안전성이 하락한 상태다.
유동성 위기설이 고조되면서 금호는 금호생명 지분과 부동산을 매각해 5조9000억원 규모의 자금을 확보한다는 기업설명회를 갖기도 했다.
유진그룹은 1조9500억원에 하이마트를 인수했고 기초소재·고려시멘트 흡수합병으로 그룹의 차입금이 8162억원으로 늘었다. 유진투자증권을 인수한 것도 재무구조를 악화시킨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하이마트 인수에 따른 자금 지출로 유진기업 차입금도 943억원 증가해 2008년 9월 기준 자산총계 대비 총차입금이 56.6%를 기록했다. 결국 유진그룹은 인천 시멘트공장과 한국GW물류 지분을 매각해야만 했다.
이랜드그룹도 M&A에 따른 소화불량으로 2006년 야심차게 인수했던 이랜드리테일(옛 까르푸)을 재매각하는 진통을 겪어야 했다.
이로써 자금문제는 해결했으나 주력 브랜드를 상실한 이랜드의 신용등급 전망이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돼 추가적인 등급 하락도 맞을 수 있다.
그나마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기 전에 이랜드리테일 재매각을 단행해 위기를 비껴갈 수 있었다고 시장 일각에서는 평가한다.
두산그룹은 2001년 한국중공업에 이어 2005년 대우종합기계를 1조8973억원에 인수함으로써 두산중공업과 두산인프라코어라는 중공업 중심 그룹으로의 변신에 성공했다.
그런데 2007년 두산인프라코어가 밥캣을 인수하면서 시장의 우려가 확산됐다. 밥캣 등 3개 사업부문을 49억달러에 인수했는데 차입금 부담 때문에 지난해 8월 10억달러 규모의 계열사 출자를 결정했다.
여기에 서브프라임 여파로 미국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고 건설경기가 바닥을 기면서 밥캣의 실적 악화설이 부각됐고, 이는 두산그룹 전체의 유동성 우려를 불렀다.
두산이 최근 주류사업을 롯데에 매각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것과 계열사 보유주식 매각 움직임 등도 유동성 확보 차원으로 해석되고 있다. 주류사업의 매각가는 당초 예상치의 절반 수준인 4000억원대에서 체결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제위기가 심화되면서 시장에 다시 나온 M&A 매물들의 가격도 크게 떨어지는 추세다. C&그룹은 매수자를 찾지 못해 자금 마련에 난항을 겪고 있고, 쌍용건설 인수에 나섰던 동국제강도 주가 급락과 자금 조달에 대한 부담으로 이행보증금을 떼이면서까지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1800억원에 인수했던 유진투자증권을 시장에 내놓은 유진그룹도 본입찰 참여기업들이 1200억원 정도의 가격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손해를 볼 것으로 보인다.
업계 관계자는 “M&A로 시너지를 노린다면 여유자금으로 싸게 인수하는 것이 요즘 같은 불확실한 시기에 갖춰야 할 자세”라며 “재무적 투자자 유치 등을 무리하게 동원하면 주주들에게 짐을 안기는 꼴이며 인수 후 조직통합 등을 고려할 때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광용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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