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이광표 기자] 10여년 만에 국회 문턱을 넘은 금융소비자보호법(금소법)이 오는 25일 시행된다. 금융당국은 오랜 숙원이었던 법령 통과로 소비자 권리가 한층 강화되고 2~3년간 금융권을 뒤흔들었던 불완전판매 문제도 대폭 줄어들 것으로 기대한다. 반면 금융회사들은 걱정이 앞선다. 금소법의 강도높은 규제와 처벌 탓에 영업 위축이 불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기대와 우려가 공존하는 가운데 법 시행 초기 금융권 현장의 대혼란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금소법 시행령은 법 시행 열흘 전인 지난 16일에야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 23일 현재까지 구체적인 시행세칙도 나오질 않았다.
금융권 안팎에선 시행령 이하 하부규정이 시행 이후에야 나올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소비자도, 금융회사도, 금융당국도 명확한 기준 없이 법이 시행되는 것이다. '깜깜이' 법령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이를 의식한 듯 금융당국은 6개월간의 유예기간을 예고했다. 법은 시행됐는데 6개월은 지켜보겠다는 촌극이 벌어진 셈이다. 지난 17일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향후 6개월간은 지도(컨설팅) 중심으로 감독하겠다"고 밝혔다. 금소법 내용이 워낙 방대하고 새로운 내용인 만큼 고의·중대한 법령 위반 또는 감독당국 시정요구에 대한 불이행 건 이외에는 비조치(법·규정에 따라 조치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허용 의견)하겠다는 의미다.
가이드라인 조차 불분명한 법령 시행에도 불구하고 금융당국은 장밋빛 기대감 일색이다.
금융소비자의 법률적 권리가 강화되고 금융회사가 반드시 소비자 보호를 위한 내부통제 기준과 조직을 둬야하는 등 각종 의무가 강화됐다는 점에서 "소비자 권익을 넓히고 보호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새로운 제도"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를 위해 처벌 수위를 높인 점이 핵심이다. 금융회사가 6대 규제를 어기면 관련 수입의 최대 50%를 ‘징벌적 과징금’으로 내야한다. 판매 직원이 최대 1억원의 과태료를 물어야할 수도 있다.
금융권 내부에선 우려감이 팽배하다. 가뜩이나 사모펀드 사태 이후 위축된 영업현장에서 판매 직원들의 ‘몸 사리기’가 나타나고, 규정을 악용하는 ‘블랙컨슈머’를 양산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해서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금소법 시행으로 청약철회를 할 수 있는 기간이 법적으로 보장되면서 주가연계펀드(ELF)의 상품성이 대폭 낮아질 것”이라며 “지난해 코로나19로 대폭 위축됐다 최근 주식시장 호황으로 늘어난 펀드 판매가 다시 위축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금융사와 소비자간 분쟁도 급격히 늘어날 거란 지적이 나온다. 판매규제 중 ‘적정성의 원칙’이 논란의 소지가 될 수 있다. 적정성 원칙이란 소비자가 스스로 금융상품 가입을 원하더라도 투자목적, 재산상황 등에 따라 판매사가 적절치 않다고 판단되면, 이 사실을 투자자에게 알리고 서명, 기명날인, 녹취 등으로 확인을 받아야 한다는 규정이다.
혹시모를 분쟁을 피하려면 금융상품 가입과 관련된 ‘문턱’을 높일 수 밖에 없다는 게 금융사들의 설명이다. 은행 관계자는 “금융위가 소비자의 상품에 대한 이해도를 측정할 때 ‘주관적 질문’은 피하라고 안내했지만, 측정할 방법이 모호한 게 사실”이라고 했다.
금소법에 포함 된 위법계약해지권도 소비자가 행사할 경우 금융사가 지출한 ‘마케팅 비용’을 누가 물어야 하는지, 금융투자상품 계약 철회시 손익을 누가 책임져야할지도 논란의 소지다. 폐쇄형 사모펀드의 경우 계약해지권을 악용해 손실을 배상하라는 소비자 요구가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발등의 불이 된 금융회사들은 금소법 시행을 앞두고 내부통제 기준을 강화하고, 상품 판매 시스템 바꾸는 데 한창이다. 하지만 가이드라인도 명확하지 않아 영업현장 개선의 구체적 방향을 잡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금융사들의 의무는 커졌지만 구체적인 법 적용 기준이 모호해 우선은 법률리스크를 피하는 데 집중할 수 밖에 없다는 푸념도 나온다.
6개월이란 유예기간도 충분할 지는 미지수다. 상품설명서를 규정에 맞추고, 전산시스템을 새로 수정하는 데만도 수개월이 걸릴 것이라는 게 업계의 관측이다.
일각에선 '법률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대면판매를 기피하고 소비자 입장에서도 법령을 알 수 없어 새로 갖게 된 권리를 행사하기 쉽지 않을 거란 전망이 나온다. 거래 액수가 작은 일반 고객들은 온라인으로 내몰리고, 그나마 금융회사에 돈이 되는 고액자산가들만 금소법 시행에 따라 높아질 양질의 서비스를 누리게 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금소법 시행이 코 앞이지만 시행세칙도 나오지 않아 법률리스크를 피하기 위해선 금융사가 스스로 보수적인 영업에 나설수 밖에 없다"며 "시행 초기에는 법 적용대상이 되는 전체 금융권에 혼란이 올 수 밖에 없어 보인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