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와 정희왕후 능침 광릉에 얽힌 이야기
상태바
세조와 정희왕후 능침 광릉에 얽힌 이야기
  • 김종혁 기자
  • 승인 2016.07.18 08: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조의 유언 따라 울창한 숲으로 조성
인근 마을 사람들이 왕릉 수호군 역할 수행
울창한 숲속 왼쪽 능침이 세조, 오른쪽이 정희왕후 능침이다.  사진=문화재청
[매일일보]  조선 제6대 임금 세조와 정희왕후 능침이 있는 광릉(光陵)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한다. 왕실의 장례를 치르고 왕릉을 조영, 관리하는 일은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이었던 유교의 예법을 충실히 따르며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과정이었으므로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다.따라서 능의 입지 선정, 조영된 능의 관리감독, 천장 등 왕릉과 관련된 사항에는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같이 했다.

'능 수호군'임무수행  광릉 인근 마을 주민

'예종실록' 1469년(예종 1년) 8월 13일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호조(戶曹)에서 아뢰기를 "일찍이 경기의 광주, 지평, 양근, 가평, 포천, 영평, 양주, 적성, 마전, 삭녕, 장단 등 여러 고을에서 유이(流移)한 백성들을 본 고을로 돌려보낸 뒤에 복호(復戶)하되, 포천현(抱川縣)의 백성은 광릉(光陵)의 수호군(守護軍)으로 이속시키고 경작하는 땅에 대한 공부(貢賦)를 감해 줄 것을 의논하여 아뢰라고 명하셨습니다.

청컨대, 제도 관찰사로 하여금 쇄환(刷還)하고 계문(啓聞)하게 한 뒤에 3년 동안 복호하고, 그 전지(田地)는 연한(工作年限)에 구애하지 말고 도로 주어서 생업에 안정되게 하소서.-포천 백성으로서 지금 광릉의 수호군으로 소속된 자 28인에게는, 청컨대 경작하는 땅의 공부(貢賦)를 감해 주소서.

-양주 백성으로서 수호군으로 소속된 자 42인의 공부도 포천의 예(例)에 따라 견감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이 나온다.

다시 말하면 당시 유랑하던 백성들 가운데 광릉 인근 포천현 사람들은 왕릉을 관리하는 임무를 주어 세금을 면하고 능침을 관리 하도록 했다는 말이다.위의 기록처럼 조선시대 왕릉 인근 마을의 사람들에게는 왕릉을 관리하는 책무가 부여됐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왕릉의 수호군이 되어 매일 조를 짜서 왕릉 주위를 순찰했다.왕릉을 둘러싼 산림의 병충해 피해가 심각하면 인근 주민들이 능 부근의 20리 까지 직접 손으로 벌레를 잡아 없앴다. 이들을 총괄 감독하는 것은 종9품 관리인 능참봉이었다.

광릉 옆 수목원 이야기

조선 7대 임금 세조의 능인 광릉의 주위로 다양한 생물들이 자생하고 있는 울창한 숲이 형성돼 있다. 이 숲은 산림청의 연구기관에서 꾸준히 관리하다 1984년 광릉 수목원으로 조성됐으며, 1999년에 국립 수목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운영하고 있다.광릉뿐만 아니라 서울과 서울 근교의 조선 왕릉 부근에는 규모의 차이는 있으나 항상 푸른 숲이 조성되어 있어 도심 속의 쉼터로 기능하고 있다.
 

산으로 겹겹이 에워싸인 능지

왜 조선 왕릉 부근에는 이렇게 항상 숲이 있을까? 우선 왕릉의 입지를 선정할 때에는 항상 풍수지리상의 길지를 고려했기 때문이다.풍수지리적 길지의 요건으로서는 여러 기능을 하는 산자락이 능침의 후면은 물론이고 좌우를 감싸는 지세가 필요하다.따라서 능역의 대부분이 자연 산림 공간으로 겹겹이 에워싸인 곳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에 더하여 능역에는 다양한 나무를 인공적으로 심어 조경을 했다.능침 공간과 제향 공간에는 잔디를 깔아 사초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동선을 따라 진달래 등의 꽃나무를 심고 연못 주변에는 버드나무를 심었다.특히 봉분의 좌우 및 후면에는 소나무를 심고, 전면의 낮은 지대에는 오리나무를 심는 것이 능침 공간 조경의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광릉을 조영할 때, 능 조성의 전 과정에 대한 기록을 엮어 만든 '광릉지(光陵志)'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금천교를 지나 향로를 따라 좌우에 진달래를 수 백 그루 식재하고 재헌(재실) 북쪽 창문에까지 두견화를 수 백 그루 식재했다. 또 서쪽, 동구 십리의 길에는 수많은 전나무와 측백나무 혹은 잣나무를 심었다. 동쪽 동구 5리 정도의 길에는 전나무, 잣나무와 더불어 진달래를 서로 맞대어 심어 놓았다. 또 서쪽 담장 밑에 화훼류를 심어 무성하게 했다'는 기록이 나와있어 조선 왕릉의 산림이 얼마나 철저히 조성 및 관리됐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자료출처=문화재청,국립수목원>


좌우명 : 아무리 얇게 저며도 양면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