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변주리 기자] 진보 진영에 ‘사상의 은사’로 추앙받는 고 리영희 선생은 생전에 “일제 강점기 민족독립운동과 오랜 반독재 투쟁을 통해 언론이라는 낱말에는 ‘옳은 일을 위해서 잘못된 것을 비판하고 그것에 항거’한다는 역사적 함축이 담기게 됐다”며, “지금의 보도기관에 대해서 ‘언론’이니 그런 말을 쓰는 게 주저스럽다”고 말한 바 있다.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와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언론본부는 2일 ‘대북보도, 이대로 좋은가?’라는 주제로 긴급토론회를 개최해 언론의 북한관련 보도가 남북관계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평가하고 대안을 모색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 냉전정책에 대한 후원자 넘어
남북 관계 단절의 주역으로까지 부상한 국내 언론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남북의 평화를 위한 시도가 무산됐다. 남북 고위급 군사회담 개최 준비를 위해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 집'에서 지난 달 8일 열린 남북 군사실무회담이 별 다른 성과 없이 종료된 것이다.
북측대표단은 “상호 도발로 간주될 수 있는 군사적 행위를 엄금할 데 대한 문제를 협의하는 절충안을 또 다시 내놓았지만 회담 결렬 마지막까지 남측은 두 사건에 대한 책임 있는 조치와 추가도발 방지 확약만을 의제로 삼아야 한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했다”며 우리 측을 비난했지만 이번 협상이 결렬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남북관계야 깨지건 말건~
남북 군사실무회담 이틀째인 2월9일, 북한 대표단은 회담 시작과 함께 남한의 언론 보도에 대해 불만을 터뜨렸다. 전날 회담에서 보인 북측 대표단의 발언과 태도가 남측 언론에 유출된 것이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것이다.
<문화일보>는 이날 “북한은 첫 실무회담에서 서두르는 가운데 부드럽고도 절박한 자세로 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며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우리는 기본 입장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자세를 유지했으나 북한은 바짓가랑이라도 잡아야겠다며 절실하게 달려드는 듯한 분위기였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가 나간 뒤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겉으로 대화에 관심이나 있는 듯이 흉내를 내고 속으로는 북남대화 자체를 거부하여 반공화국 대결정책 전환을 요구하는 내외여론을 무마시키려는 것이 역적패당의 흉악한 속내”라며 우리 정부를 비난했다.
청와대는 곧 사태파악과 함께 강도 높은 조사를 지시했지만, 2008년 10월 이후 2년 만에 어렵게 성사된 남북 군사실무회담은 이미 결렬된 후였다. 문제가 된 보도의 이면에는 남북관계에 있어 냉전적 대결의식에서 아직까지 벗어나고 있지 못한 특성이 바탕에 깔려있다.
토론회에서 한겨레 강태호 기자는 “이데올로기적 편향과 정치적 기자들의 자질문제, 그리고 추측성 보도의 남발의 폐해가 가장 큰 곳 가운데 하나가 외교·통일·안보 관련 부처”라고 지적한다.
강 기자는 “한국 언론은 남북관계에서는 아직도 냉전적 대결의식이 반영돼 있으며, 맹목적인 애국심과 배타주의, 대북 적개심 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면서 “특히 북한보도의 경우 오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보 내도 확인할 길 없고~
강 기자의 지적처럼 대북관련 보도의 가장 큰 문제는 언론이 북한에 대해 수많은 기사를 쏟아내면서도 그러한 기사들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북한의 화폐개혁 이후 남측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던 ‘박남기 전 노동동 계획재정부장의 총살’ 기사를 들 수 있다.
지난해 3월 여러 매체가 화폐개혁 실패에 대한 책임으로 박남기 전 노동당 계획재정부장이 평양에서 총살됐다고 앞다퉈 보도했지만 최근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는 북한 고위급 소식통을 인용해 “박남기는 여전히 건재하며 김정일의 개인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밖에 북한에서 집단시위가 발생했다는 설이나, 김정일의 후계자인 김정은이 군부대 시찰 과정에 쌍안경을 거꾸로 들고 봤다는 설 등은 여러 언론에서 앞다퉈 보도했지만 나중에 공신력 있는 채널을 통해 모두 사실무근이거나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대해 토론회 발제를 맡은 고승우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언론본부 정책위원장은 “이른바 북한 관련 기사에 대한 ‘세탁’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면서 근거가 희박한 ‘기사’들이 생명력을 얻어 남측 사회에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있다”며 언론의 무책임성을 지적했다.
고 위원장은 “이러한 기사들은 대북단체, 대북비판언론 등이 ‘북한 소식통’ 또는 ‘북한 현지 주민’을 인용해 만들어 내는 것이 대부분”이라면서 “‘북한 소식통’ 또는 ‘북한 현지 주민’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남측 통신사 등이 액면 그대로 그런 기사들을 보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이정희 대표는 “문제는 이런 보도행태가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 평화를 원천적으로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며 “반목과 질시, 대결을 부추기는 것에서 나아가 긴장고조와 전쟁위기까지 불러온다”고 우려했다.
대북정책 ‘나팔’을 불어라~
이정희 대표가 가장 강조한 우려사항은 언론들이 이명박 정부가 취하고 있는 대북정책의 나팔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대표는 “현재 진행되는 한미합동군사훈련 ‘키 리졸브’와 관련해 주요 언론들이 흥미위주로 보도하면서 공격훈련을 미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대표는 “심지어 일부 언론들은 훈련 중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면 지체 없이 공격에 나설 것을 주문하는 등 한반도 긴장고조와 전쟁위기를 부추기고 있다"며, "그야말로 전쟁 선동 언론 그 자체”라고 꼬집었다.
고승우 위원장도 “최근 대부분의 언론은 ‘비핵·개방3000 언론’”이라며, “6·15공동선언, 10·4선언을 외면하고 북한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치 않으면서 북한의 굴복을 강요하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을 언론은 철저히 옹호하고 지원했다”고 말했다.
고 위원장은 “남북 교류협력관계가 거의 단절된 상황에서 대부분의 언론은 ‘비핵·개방3000’의 충실한 협력자 역할을 하면서 ‘철저한 국내 수구세력과 미국 입장 대변’, ‘아니면 말고’, ‘대북 감정 악화’를 부추기는 보도를 양산하고 있다”며, 한 예로 최근 북한이 6·15공동위원장회의와 3·1절 행사 등의 대화 제의를 했지만, 언론들은 현 정부의 입장만을 반복해 전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일상화된 전쟁훈련…왜 비판하지?
언론의 이러한 보도행태는 오랫동안 제기되어 온 문제다. 이정희 대표는 “분단과 전쟁, 독재정권과 군사 정권 등을 거치면서 우리나라 언론은 군의 전쟁훈련에 대해서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지 않는 것이 매우 일반화 되어 있다”며 “오히려 이를 부추기고 선동하는데 익숙해져 있다”고 말했다.
한겨레 강태호 기자도 “비본질적인 문제의 대서특필, 문제핵심 비켜가기, 일면보도, 후속보도 생략, 사건중심 보도, 표피적 현상 보도 등 굳이 대북 보도에서만이 아니라 한국 언론 보도의 문제점들은 숱하게 지적돼 왔다”고 고백했다.
문제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10년과 비교해 봤을 때 상대적으로 이명박 정부 들어 언론의 왜곡된 보도행태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점. 강 기자는 “한국언론의 북한보도와 통일관련 보도가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화해 협력의 방향을 수용해 많은 개선이 있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최근의 대북보도 문제점들은 역시 정치환경의 변화에 의해 나타난 부정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 기자는 또 “이명박 정부는 남북관계가 악화된 책임은 북한에게 있다고 말하며 이를 보여주는 정보들이 계속해서 양산하고 있지만 남북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언론은 이 정보를 활용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중앙일보 이영종 정치부문 차장 역시 “이전 정부와 달리 북한에 대해 보다 원칙적인 입장에서 대북정책을 추진한 이명박 정부에 대해 북한이 반감을 드러내면서 남북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며 “북한의 실태나 남북관계의 현황에 대한 최근 우리 언론의 보도는 만족스럽지 못한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라고 고백했다.
통일·외교분야는 기자들이 들렀다가는 곳?
가장 전문적인 분야에 가장 경험 없는 기자 배치하는 관행
한겨레 강태호 기자는 “이제는 ‘대북보도 이대로 좋은가’를 논하기 보다 ‘왜 이대로 계속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제기와 대안을 모색해야 할 때”라면서 대북보도의 문제점은 언론 내부 취재시스템의 변화를 통해 개선해야 한다고 언론 스스로의 성찰과 변화를 주장했다.
그는 “통일·외교 분야의 경우 취재에서 전문성이 요구되고 있다는 점에서 전문기자제와 심층보도가 요구된다”며 “비전문적이고 경험이 적은 기자들이 잠시 들렀다 가는 곳으로 나타나고 있는 각 언론사들의 통일·외교통상부 출입기자에 대한 인사 관행을 바꾸는 것이 왜곡된 무책임한 보도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하나의 과정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중앙일보 이영종 차장 역시 북한보도의 전문성 제고 문제를 한국 언론의 대북보도가 풀어야 할 숙제 중 하나로 지적했다. 이 차장은 “북한문제의 취재·보도에 있어 콘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 북한 전문기자의 양성 등 인적투자가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며 “언론은 스스로 북한·통일문제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소양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정보에 대한 접근성의 문제도 지적됐다. 이 차장은 “노무현 정부 시기 이뤄진 정부와 언론관계의 재설정 시도는 통일부와 외교부, 국방부 등 주요 취재대상에 대한 공식적인 접근이 사실상 봉쇄됐고 이런 흐름은 MB정부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러한 현실에서 기자들이 고단한 외교안보 부처를 외면하고 상대적으로 웰빙할 수 있는 취재분야를 선호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며, 북한의 내부 소식통을 인용하는 대북 매체가 늘어나고, 언론들이 이를 재인용하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는 현상을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SBS 안정식 기자는 “대북 매체들의 보도는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충고했다. 안 기자는 “미국의 방송매체인 ‘미국의소리(VOA)’의 경우 적어도 3군데 이상 정보의 소스를 확인하는 원칙이 존재한다”며 “어디에서 어떤 사건이 터졌다는 개별 사건들에 대한 보도의 경우 인용하는 데 있어 당국의 비공식적인 확인이라도 거치는 등 보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통일뉴스 김치관 편집국장은 ‘시민의식’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김 국장은 “북한의 화폐개혁 실패 책임을 지고 처형당했다고 보도된 박남기 국가계획위원장이 살아있다는 보도가 다시 나왔지만 어느 언론사도 이전의 처형설 보도가 오보였다고 사과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김 국장은 “언론단체와 6·15언론본부 등 시민사회가 북한 관련 언론보도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해 이 같은 사실들을 기록, 공개하고 백서로 만들어 인터넷 서비스를 한다면 언론의 경계심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