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20대 임금 경종 · 선의왕후 의릉(懿陵) 단의왕후 혜릉(惠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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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0대 임금 경종 · 선의왕후 의릉(懿陵) 단의왕후 혜릉(惠陵)
  • 김종혁 기자
  • 승인 2016.08.13 10: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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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의릉(懿陵)은 조선 20대 경종과 두 번째 왕비 선의왕후 어씨의 능이다. 의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앞뒤로 나란히 배치한 '동원상하릉'의 형식이다.
경종 의릉 무석인
곡장을 두른 위의 봉분이 경종의 능, 곡장을 두르지 않은 아래의 봉분이 선의왕후의 능이다.
이러한 형식은 능혈의 폭이 좁아 왕성한 생기가 흐르는 정혈(正穴)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풍수지리적인 이유이다.능침은 두 봉분 모두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장명등, 혼유석, 석양, 석호, 석마, 문무석인 등을 배치했다.
꼬리가 등 뒤로 올라가게 표현한 의릉 선의왕후 석호 모습
경종의 능침에 배치된 망주석 세호는 왼쪽은 위를 향해 올라가있고 오른쪽은 아래를 향해 내려가 있으나, 선의왕후의 능침은 반대로 조각돼 있다.특히 경종의 능침 무석인의 뒷면에는 짐승 가죽을 나타내기 위해 꼬리가 말린 것을 조각했고, 선의왕후의 능침 석호는 꼬리가 등 뒤로 올라가게 하는 등 재미있게 표현했다.<오른쪽 위 사진>

능의 역사

1724년(경종 4년)에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같은 해 양주 중랑포 천장산 언덕에 능을 먼저 조성했다. 그 후 1730년(영조 6년)에 선의왕후 어씨가 세상을 떠나자, 의릉 동강 하혈(下穴)에 능을 조성했다.
의릉 석양과 석호
의릉은 1960년대 초 당시의 중앙정보부가 능역 내에 있어서 일반인에게는 철저히 봉쇄된 구역이었다. 당시에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연못을 만들고 돌다리를 놓는 등 훼손이 심했다.이후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로 바뀐 후 서초구 내곡동으로 이전하면서, 1996년에 일반인에게 다시 공개됐고, 2003년 12월부터 2005년 12월까지 외래수종 제거, 전통수종 식재, 인공연못 성토, 금천교 복원 등 기초적인 의릉 능제복원 정비공사를 마쳤다.

경종(景宗) 이야기

경종(1688~1724)은 숙종과 옥산부대빈(희빈) 장씨의 아들로 1688년(숙종 14년)에 창덕궁 취선당에서 태어났다. 경종이 태어남으로서 서인과 남인의 대립인 기사환국이 일어나 남인정권으로 교체 됐다.기사환국으로 어머니 장씨가 왕비로 책봉되고, 경종은 원자를 거쳐 1690년(숙종 16년)에 왕세자로 책봉됐다. 그러나 1701년(숙종 27년)에 무고의 옥(인현왕후 저주 사건)으로 어머니 장씨의 죽음을 목격하기도 했다.1717년(숙종 43년)에 숙종을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다 1720년에 숙종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재위 4년 뒤인 1724년(경종 4년)에 창경궁 환취정에서 37세로 승하했다.경종 재위 시절 1721년(경종 1년)과 1722년(경종 2년)에 두 해에 걸쳐 연잉군(영조)의 왕세제 책봉을 둘러싸고 큰 옥사가 일어났는데 이를 신축임인옥사(신임옥사)라고 한다.숙종 말기는 노론과 소론이 치열하게 대립했던 시기로, 경종 즉위 후 당시 노론의 4대신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가 중심이 돼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자는 주장을 했다.소론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종은 1721년(경종 1년)에 이를 허락했다. 그러자 노론 측은 한 발 더 나아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경종을 두고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했다.이 과정에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격화됐고, 결국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 4대신들은 파직 후 유배를 당하는 신축옥사가 일어났다.  그 뒤에도 소론 강경파들은 노론의 숙청을 요구했다. 1722년(경종 2년)에는 노론측이 세자 시절에 경종을 시해하려고 했다는 고변을 기점으로 노론 4대신을 사사하며 수백 명의 노론파를 제거하게 되는 임인옥사가 일어난다. 그러나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조정에는 또 한 차례의 숙청의 바람이 불게 된다.

선의왕후(宣懿王后) 이야기

의릉 홍살문
경종의 두 번째 왕비 선의왕후 어씨(1705~1730)는 본관이 함종인 함원부원군 어유구와 완릉부부인 이씨의 딸로 1705년(숙종 31년)에 숭교방 사저에서 태어났다.1718년(숙종 44년)에 왕세자빈 심씨(단의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같은 해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됐고,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경종이 세상을 떠나고 영조가 즉위하자 경순왕대비가 됐으며, 1730년(영조 6년)에 경덕궁 어조당에서 26세로 세상을 떠났다.
의릉 선의왕후 장명등
선의왕후가 중전 재임시절 경종이 후사가 없자 종친 중에서 어린 아이를 입양해 후사를 정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실제로 궁중의 일각에서는 소현세자의 후손인 밀풍군의 아들 관석을 입양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그러나 1721년(경종 1년)에 경종의 이복 동생인 연잉군(영조)이 왕세제로 책봉됐다.경종이 아무리 병약하다고는 하나 즉위 1년 만에 왕세제를 책봉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노론은 소론과의 알력 다툼에서 살아남기 위해 왕세제 책봉 뿐 아니라 대리청청까지 주장했고, 계속적인 정권싸움과 숙청의 바람을 몰고 왔다. 이러한 어지러운 정국의 한 가운데에, 결국 선의왕후의 양자 입양은 무산됐다.

제20대 경종 원비 단의왕후 혜릉(惠陵)

능의 구성

혜릉 난간석
혜릉은 조선 20대 경종의 첫 번째 왕비 단의왕후 심씨의 능이다.단의왕후는 왕세자빈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묘의 형식으로 단출하게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능역이 전반적으로 좁고 석물의 크기가 작지만 석물 배치는 일반왕릉과의 차이가 없다. 봉분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러져 있고, 석양과 석호는 네 쌍이 교대로 배치됐다.
혜릉 무석인
문석인과 무석인은 명릉(明陵) 이후의 양식을 그대로 따라 사람 크기만 하게 조각했다.망주석 역시 다른 능보다 훨씬 작은 규모로 만들었는데 조각된 세호의 좌우 방향이 다르게 돼 있다.장명등은 현재 망실되어 터만 남아있고, 정자각은 광복 후 한국전쟁 때 소실됐다가 1995년에 새로 복원했다.

능의 역사

1718년(숙종 44년)에 단의왕후 심씨가 왕세자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인 숭릉 왼쪽 산줄기에 묘를 조성했다. 1720년에 경종이 즉위하자 왕후로 추존돼, 능호를 혜릉(惠陵)이라 했다.

단의왕후(端懿王后) 이야기

경종의 첫 번째 왕비 단의왕후 심씨(1686~1718)는 본관이 청송인 청은부원군 심호와 영원부부인 박씨의 딸로 1686년(숙종 12년)에 회현동(현 서울 회현동) 우사에서 태어났다.
혜릉 향로와 어로
단의왕후가 5세 때이던 어느 여름날, 아버지 심호가 술에 취해 낮잠을 자면서 딸에게 부채를 들고 파리를 쫓게 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저녁때가 되도록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켰다한다.심호는 그 딸을 매우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해 항상 가인들에게 이를 칭찬했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천성이 간소한 것을 좋아해 남이 좋은 옷을 입더라도 부러워하지 않았으며, 좋은 것이 생기더라도 반드시 여러 동생들에게 모두 나누어주는 등 물건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고 한다.

1696년(숙종 22년)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됐는데, 실록에는 하루 종일 단정하게 앉아서 잠시라도 함부로 기대거나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시녀들이 궁궐 구경하기를 청해도 따르지 않고 '소학(小學)'을 읽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타고난 의젓함과 총명함으로 궁궐의 어른들과 병약한 세자를 섬기는 데 손색이 없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1718년(숙종 44년)에 창덕궁 장춘헌에서 33세로 세상을 떠났다. 경종 사이에는 소생이 없으며, 1720년에 경종이 즉위하자 단의왕후로 추존됐다. <자료,사진 출처=문화재청,공공누리집,조선왕릉관리소>


좌우명 : 아무리 얇게 저며도 양면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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