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공주 갑사 대웅전’·‘의성 대곡사 범종루’·‘순천 팔마비’ 보물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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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공주 갑사 대웅전’·‘의성 대곡사 범종루’·‘순천 팔마비’ 보물 지정
  • 김종혁 기자
  • 승인 2021.03.2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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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은 '영천 거조사 영산전'으로 명칭 변경
[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공주 갑사 대웅전(公州 甲寺 大雄殿),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의성 대곡사 범종루(義城 大谷寺 梵鍾樓),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순천 팔마비(順天 八馬碑)등 3건의 문화재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했다. 또한, 국보인'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의 명칭을 원래 명칭인 <영천 거조사 영산전>으로 변경했다.
공주 갑사 대웅전은 정유재란 이후 갑사에서 가장 먼저 재건된 건축물 중 하나로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고, 현재까지 이어져 오면서 대체로 원형을 유지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대웅전 내부의 ‘갑사소조삼세불(보물)’이 1617년에 만들어졌고, 1659년에 「갑사사적비」가 세워지는 과정을 고려하면, 갑사 대웅전의 건립연대는 17세기 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갑사 대웅전 정면 사진=문화재청 제공
갑사 대웅전 정면 사진=문화재청 제공
의성 대곡사 범종루는〈대곡사 창건 전후 사적기>의 기록을 통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병화로 전소되어 17세기 중·후반인 1644년에서 1683년 사이에 중창되었다고 전해진다. 범종루는 정면 3칸, 옆면 3칸의 2층 누각 건물이다. 현존하는 누각 건축 중 17세기 전반의 것은 대부분 3칸 평면을 가지고 있고, 이후 누각 평면이 3칸에서 5칸, 7칸으로 점차 확장되어 가는 경향을 살펴볼 때 범종루는 기존에 남아 있는 누각 건축 중에서도 이른 시기인 17세기 전반의 특징을 가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의성 대곡사 범종루 사진=문화재청 제공
'순천 팔마비'는 1281년(충렬왕 7) 이후에 승평부사(昇平府使) 최석(崔碩)의 청렴함을 기리기 위해 승평부(지금의 순천)에 건립한 비석이다.
최석의 행적과 승평부의 읍민들이 팔마비를 건립한 사실은 고려사의 열전(列傳)에 나타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승평부에서는 수령이 교체되면 말 8필을 기증하는 관례가 있었는데, 최석은 승평부에서 기증한 말을 타고 비서랑의 관직을 받아 개성으로 떠난 후 자신이 기증받은 말과 자신의 말이 승평부에 있을 때 낳은 망아지까지 돌려보냈다. 이후로 승평부에서는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수령에게 말을 기증하는 폐단이 사라졌고, 읍민들은 최석의 청렴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팔마비를 세웠다고 전한다.
팔마비 사진=문화재청 제공
팔마비 사진=문화재청 제공
비석은 고려말 처음 건립된 이후 1300년대 초반 쓰러졌으나 다시 세워졌고, 이후 정유년(1597년, 선조 30)의 병란으로 완전하게 훼손되었다. 그러나 1616년 부사로 부임해 온 이수광에 의해서 1617년 다시 건립되었고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현재까지 온전하게 전해졌다. 한편, 그동안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으로 불리던 것을 <영천 거조사 영산전>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거조암’ 이란 명칭은 1912년 은해사(銀海寺)의 말사가 되면서 바뀐 이름으로 원래 명칭은 거조사(居祖寺)였다. 1478년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등 각종 문헌에 거조사로 명명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2007년 조계종에 거조사로 사명을 인정받았고, 발굴조사(2003~2005)를 통해서도 상당히 넓은 사역에 불전과 탑 등이 확인되는 등 사찰로서의 면모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그동안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의 문화재 명칭은 ‘거조사’의 본래의 이름을 되찾아 <영천 거조사 영산전>으로 변경했다.


좌우명 : 아무리 얇게 저며도 양면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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