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에게 잠시 양해말씀을 구하겠습니다, 좋은 물건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나왔습니다”
지하철을 타게 되면 한번쯤은 듣게 되는 말이다. 바로 지하철 내에서, 혹은 역사 안에서 물건을 파는 지하철 행상, 속칭 ‘기아바이’에게서 들을 수 있는 ‘멘트’다. 목적지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싣고 있으면 큼지막한 가방에 다양한 생활용품을 담은 그들이 칸칸이 이동하며 물건을 파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오로지 다리품과 말재주만으로 승객들에게 단돈 ‘1천원’에서 ‘3천원’ 정도의 가격으로 물건을 판매하는 ‘기아바이’의 일은 생각만큼 녹록치 않다. 더구나 나아질 줄 모르는 경기불황으로 이 일에 뛰어드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경쟁 또한 치열해졌다. 여기에 단속을 다니는 공익요원들의 감시망도 피해야 하니 벌이가 더욱 쉽지 않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가장에서부터 어린 손주들을 데리고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 노인들까지, 각자 고단한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오늘도 지하철을 옮겨 다니는 ‘기아바이’들을 <매일일보>에서 밀착취재했다.
기자가 찾아간 곳은 ‘기아바이’들이 많이 모인다는 1호선 금정역. 서울방면의 역사 내에는 커다란 가방과 함께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말끔한 정장 차림의 한 남성에게 다가가 하루 동안의 동행을 부탁했다.자녀들에게 일반회사원으로 보이기 위해 아침 8시면 꼭 집에서 나온다는 김모(46ㆍ남ㆍ부천)씨. 김씨는 낮에는 지하철에서 물건을 팔고 저녁에는 닭 집에서 포장 일을 한다. 2003년 겨울까지만 해도 H사에서 홍보 일을 하던 김씨는 어떤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어쩔 수 없이 회사에서 나와야 했다고 털어놓았다. 2004년부터 지하철에서 물건을 팔기 시작해 올해로 4년째에 접어들었다고 하는 김씨가 파는 물건은 칫솔. 김씨는 ‘힘들지 않냐’는 기자의 질문에 “정말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몸보다는 마음이 괴롭다.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는 부끄러움과 나를 거지 취급하는 일부 사람들의 태도 때문에 가장 힘들다”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김씨는 또 “가끔 신체도 멀쩡한데 왜 이일을 하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실업자 인데다가 다시 직장을 구하기엔 나이도 많고 낮 시간에는 아르바이트 자리도 마땅치 않다”고 말했다. 김씨는 “돈을 모아 조그만 리어카에서 행상이라도 하는 게 꿈”이라며 서울방면 열차를 타고 험난한 ‘일터’로 향했다.하루 동안 번 돈, 범칙금 3만원 내고나면 남는 것 없어
기자가 두 번째로 만난사람은 1년차 초보(?) 윤모(50ㆍ여ㆍ구로)씨였다. 윤씨는 작년 1월에 친구 빛 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형편이 어려워졌다. 남편에게만 부담 주는 게 싫었던 윤씨는 생활비라도 벌어보자는 심정으로 이 일을 시작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윤씨가 판매하는 물건은 중국산 미니라디오. 윤씨의 판매 전략은 독특하다. 먼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춘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주목된다 싶으면 볼륨을 줄이고 물건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는다.하루 4시간 나물 팔아 번 돈 3천원, 손자 과자 값
지하철 1호선 금정역사 내에서 나물을 파는 박모(70ㆍ금정) 할머니. 장사를 시작한지 2시간이 지나도 돗자리 위에 쌓여있는 나물은 줄어들지를 모른다. 손자와 단둘이 반지하방에서 살고 있다는 윤 할머니는 손자가 유치원에 가있는 시간동안 손자 과자 값을 벌기위해 매일 금정역에 나온다. 기초생활수급대상자로 선정되어 매달 조금씩 지원을 받고는 있지만 그 돈 가지고는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하다. 사정이 딱해 보여 3천원어치를 구매하자 윤 할머니는 장사를 바로 접었다. 이유를 묻자 윤 할머니는 “내가 하루에 손자 과자 값으로 필요한 돈은 2~3천원이야. 기자 양반이 팔아주는 바람에 오늘 하루 목표수입은 채웠어. 이제 손자오기 전에 과자사서 집에 돌아가야지”라고 답했다. 손자 과자 값 2~3천원이 없어 영하를 오르내리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짐들을 들고 역사 내에 자리를 깔아야 하는 윤 할머니. 할머니는 “정말 고맙다”는 말을 남긴 채 발걸음을 옮겼다.단속반, “정말 울고 싶은 심정”
지하철 내 ‘기아바이’들을 바라보는 승객들의 시선은 크게 두 가지였다. 윤씨의 미니라디오를 산 이모(34ㆍ여)씨는 “지하철에서 파는 물건은 생활에 필요한 물건이 대부분이다. 불량품인 경우도 많지만 어려운 이웃도 도우면서 싸고 오래 쓸 수 있는 물건도 많기 때문에 샀다”고 말했다.반면에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표시한 임모(28ㆍ여)씨는 “지난번에 스위치만 누르면 움직이는 인형하나를 샀다가 설명서를 보고 화가 난적이 있다. ‘손가락과 장난감을 실로 묶어 손가락을 움직이면 저절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라는 문구를 보았을 땐 정말 울화통이 터졌다”고 말했다.서울역에서 지하철 ‘기아바이’들을 단속하는 공익근무요원 한모(22)씨는 “지하철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들 중 딱하지 않은 사정은 없다. 하지만 승객들의 불편민원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안전상의 문제도 있기 때문에 단속을 강화하는 실정이다. 가끔 추격전을 벌이 기도 하고 강제로 장사판을 걷을 때도 있는데 마음이 좋지는 않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