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女에 질린 南男 “北女와 결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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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女에 질린 南男 “北女와 결혼하자”
  • 송병승 기자
  • 승인 2011.01.06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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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북한 여성 전문결혼정보업체 ‘남남북녀’ 최영희 대표
[매일일보=송병승기자] ‘남남북녀’라는 말은 이제 너무도 익숙해져 조금씩 잊혀져 가는 말이지만 국제적인 행사에 등장하는 북한 여성응원단이 연신 화제가 되는 것을 볼 때 마다 다시 한 번 생각나는 말임에는 틀림없다. 요즘 길가의 현수막이나 지하철에 꼽힌 명함에서 ‘북한 여성과의 결혼’이라는 문구를 흔히 볼 수 있다. 과거 동남아시아권의 여성들을 연결해주는 국제결혼중개업소들이 성황을 이뤘던 것처럼 이제는 탈북 여성인 ‘새터민’들과의 결혼정보업체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결혼정보업계에는 북한 여성을 상대로 결혼을 주선해 주는 업체가 이미 4~5곳이 영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결혼 적령기를 지난 한국 남성들이라면 호기심에서라도 한번쯤은 생각해 보았을지도 모를 ‘북한 여성과의 결혼’. <매일일보>은 북한여성 전문 결혼정보업체 ‘남남북녀’의 최영희(42)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 봤다.


‘북녀’들이 원하는 이상형의 첫째 조건은…서로를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인지가 우선, 외모·능력·장남·부모봉양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회원으로 등록된 남남들, 공무원·교사·교수·사업가 등 능력자도 많아
대부분 남성들 “한국 여자에 이제 질렸고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다”


최영희 원조남남북녀 대표는 2002년에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새터민) 출신이다. 다음은 지난 4일 여의도에 새 단장한 남남북녀 사무실에서 나눈 일문일답.

- 북한 사람들의 평균적인 결혼 연령대나 남녀 성비는 어떠한가.△ 여자는 약 24세부터, 남자는 약 27세부터 결혼을 하는 추세다. 예전에는 여자가 30세가 넘으면 총각에게는 시집 갈 생각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요즘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평양방직공장 같은 곳을 가면 50, 60세 된 노처녀가 꽤 많다. 북한은 아무리 남자가 능력이 없어도 대부분 다 결혼을 하는데 그건 아마 여성비율이 더 높기 때문인 것 같다.
▲ 갓 결혼한 북한 신혼부부가 평양시내를 걷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 혼수는 어떻게 하나.△ 북한도 남한과 마찬가지로 결혼할 때 여자가 이부자리 등을 해가는 풍습이 있다. - 북한 여성들이 배우자를 만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서로를 배려해 줄 수 있는 사람인지 여부이다. 외모, 능력 등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소위 말해 막노동하는 사람들도 다 결혼하는 반면 재산은 많지만 오히려 결혼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키가 158인 건설 노동자를 결혼시켰는데 북한 여성인 신부 키가 훨씬 더 컸다. 하지만 여자는 그런 것들은 개의치 않았고 아직까지 잘 살고 있다. - 홈페이지에 북한여성의 프로필을 공개 안하던데△ 내가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었다. 사진도 올리지 못하는 이유가 신원보장의 문제도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혼자 탈북하기 때문에 북한에 아직 남아 있는 가족들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원조 남남북녀’에 등록되어 있는 탈북 여성과 한국인 남성은 어느 정도?△ 1년에 북한 여성이 200명 한국 남성이 150명 정도가 등록된다. 결혼을 하면 자동적으로 회원이 아니기 때문에 인원이 항상 변해 전체 회원 수는 잘 파악할 수가 없다.- 탈북 여성의 한국 남자와의 결혼 비중은 얼마나?△ 약 85%가 한국 남자를 선호한다. 한국 여성들은 능력이 없다고 반대하고 장남이라고 싫어하는 경우가 많은데 북한 여성들은 그런 경우가 드물다. 오히려 장남을 찾거나 부모님과 함께 사는 남자를 찾기도 한다. - 주 대상이 북한 여성인데 그렇다면 탈북한 남성들의 결혼은 도와주지 않는가?△ 전체 탈북자중 남성의 비율이 약 15%정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로 여성의 결혼을 도와 주고 있지만 남성의 결혼 주선을 안 해주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등록되어 있는 탈북 남성도 있다. 단 탈북 남성의 경우 반드시 직업이 있어야 한다. 직업도 없이 여자를 찾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 한다. - 소개비가 있나?△ 1년에 250만원이다.- 일반 결혼 정보 업체 보다 좀 더 비싸다는 생각이 드는데△ 결혼할 생각이 있는 남자가 250만원도 없다면 나중에 결혼 한 뒤에도 가정을 유지 할 수 없다고 생각 한다.- 동남아시아권 여성들과 북한 여성 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 우선은 성혼률도 높고 신원 보장이 확실하다. 북한 여성들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등록되어 있다. 또한 대화가 통한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기 때문에 많은 남성들이 선호하는 것 같다. 문화적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점도 거의 없다. - 북한여성결혼 정보업체를 찾는 남성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많은 사람들이 북한여성과 결혼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남한 사회의 하층민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등록되어 있는 사람들 중 공무원이나 교사, 교수, 사업가 등도 많다. 대부분 북한 여성을 찾는 이유가 ‘한국여자에게 질렸다.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다’는 것이 많다.- 많은 부부를 탄생 시키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부가 있다면.

▲ 자신이 소개해 결혼한 여성과 결혼식장에서의 최 대표
△ 현재까지 약 400쌍의 부부의 연을 이어주었다. 한 번은 한 남자의 매형이 찾아왔는데 와서 하는 말이 ‘자기 처남이 장가를 못 갔는데 나이가 42살이다. 근데 여기 보내면 안 갈 것 같아서 내가 등록 하러 왔다’고 했다.

이후 남자를 만나 봤는데 키도 작고 등치도 왜소하고 굉장히 조용한 성격이었다. 북한 여성과 세 번의 만남을 가졌는데 세 번째 만남을 보니 여자가 더 키도 크고 성격도 시원시원했다. 서로 마음에 들었는지 만난 날 동해로 드라이브를 갔다 왔다고 했다.이후 서로 마음이 통해 결혼을 결정했는데 알고 보니 시어머님 되실 분이 암선고를 받아 투병중이셨다. 일반 아들딸들도 간병인을 써서 병간호할 텐데 아직 결혼도 안한 여자가 어머니 대소변을 다 받아내고 병간호를 했다. 북한 여자들이 이렇다. 결혼식 날에도 어머님을 휠체어에 태워 직접 모셔왔다.더 뜻 깊은 것은 그동안 많은 북한 여성을 결혼시켰는데도 하나원 원장님이 한 번도 결혼식에 오신 적이 없는데 그 때는 직접 신부의 손을 잡고 입장을 하셨다. 하나원생들도 다 참여해서 축가를 불러 주었다. 그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 마지막으로 아직 망설이고 있을지도 모르는 탈북 여성, 그리고 탈북 여성을 찾는 한국 남성들에게 하고싶은 말이 있다면

△ 올해 2011년에는 결혼 못한 처녀 총각들, 남남북녀들 좋은 쌍 만나서 꼭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으면 좋겠고 건강하고 행복한 꿈 다들 이루셨으면 좋겠다. 서로 좋은 인연을 찾아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이다. 

‘자유’를 꿈꾼 여자 최영희, 그녀의 인생이야기

평양무용대학 성악과 출신, 40평 아파트 거주했던 북한의 ‘특권층’ 출신
기득권 포기하고 갖은 고행 거쳐 두 번째 탈북 끝에 한국행 선택한 이유

“참 굴곡 많은 인생이었죠. 아마 다 쓸려면 책 한권을 내도 모자랄 거에요.” 최영희 남남북녀 대표는 탈북자 출신이다. 그에게 탈북을 거쳐 결혼정보회사를 차리기까지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했더니 제일 먼저 돌아온 답은 ‘참 굴곡 많은 인생’이라는 것이었다.
▲ 북한여성결혼정보회사 '원조 남남북녀'의 최영희 대표

조금씩 이야기가 진행되자 그가 괜히 그런 말을 꺼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2002년 탈북해 인천공항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의 그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는 최 대표. 결혼정보회사 관련 인터뷰를 진행하기 앞서 그의 탈북 스토리를 들어 보았다.

평양음악무용대학 성악과 출신. 40평이 넘는 아파트. 고위층의 자녀로 태어나 부러울 것 없이 자란 최 대표였다. 아버지는 공무원이셨고 어머니는 옥류관에서 요리를 하셨다. 든든한 배경이 있었기에 최 대표가 처음부터 남한 행을 꿈꿨던 것은 아니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했던가. 처음 친구를 따라 중국에 여행을 갔다가 처음 ‘자유민주주의’ 한국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궁금했다. 그래서 북한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중국에 남았다. 하지만 그것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말이 있듯이 최 대표의 중국 체류 생활은 말 그대로 ‘개고생’이었다.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허드렛일뿐이었다. 일이 끝나면 몸이 너무 피곤해 편하게 쉬고 싶은데 집이 없으니 갈 곳도 없었다. 별을 세며 밤을 보내는 일이 부지기수. 최 대표는 당시 “오늘은 또 어디서 잠을 자야 하지”라는 생각만 들었다고 한다. 최 대표가 처음 한국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청도(칭따오)에 있는 한국 기업에서 일하면서부터다. 남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그들이 부드럽고 아기자기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북한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부드러운 맛’을 알게 되어버린 최 대표는 그 뒤로부터 조금씩 한국으로 가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하지만 국경을 넘는다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몽골 국경을 넘다 잡혀 감옥살이만 1년.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 시간을 떠올리며 최 대표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70여명의 사람들이 무릎조차 펴지 못하는 작은 방에서 생활해야 했다. 경비가 삼엄해 도망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고 현실은 화장실조차 편히 갈 수 없을 정도로 암담했다.  열흘정도 단식을 하며 버티다 결국엔 ‘이게 내 운명이니 받아들이자’고 결심하고 몇 날 몇 일을 기도했다. 그리고 이 감옥에서 나가면 꼭 한국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최 대표는 감옥에서 기도하던 생각이 아직도 생생히 난다고 했다. 신앙의 힘을 빌어 하루하루 버텨 나갔지만 한국에 와서는 한번도 교회를 갈 수 없었다고 한다. 그 당시 생각에 찬송가만 들어도 눈물이 쏟아진다는 최대표. 부모님의 도움으로 감옥을 나와 평양으로 가게 됐지만 한국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은 커져만 갔다. 고민하던 최 대표는 어머님께 “더 이상 이곳에서는 살지 못하겠다.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두 번 째 탈북을 감행했다. 다시 중국과 몽골 사막을 거쳐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내렸을때 눈앞에 펼쳐진 화려함에 최 대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하나원 교육을 받은 최 대표는 한국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궁금해 사우나 청소, 파출부 등 여러 일들을 했다. 어머님께 물려받은 음식 솜씨가 있었기에 포장마차를 하기도 했다. 타고난 음식솜씨로 사람들이 줄을 섰고 몸은 피곤했지만 혼자서 혈혈단신으로 온 한국 땅에서 홀로 설수 있는 것에 대해 즐거움을 느꼈다.  하지만 즐거움만 있었던건 아니었다. 건너편에서 포장마차 장사를 하던 아줌마가 말라 비틀어진 빵을 놓으며 "꼭 여기서 포장마차를 해야 하냐"고 말 할땐 '경쟁사회가 이런 곳이구나'를 느끼기도 했다.처음부터 최 대표가 결혼정보업체를 운영할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워낙 활발하고 밝은 성격 탓에 항상 주위에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고 탈북 단체 회장님께서 넌지시 조언을 했다. 결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최 대표는 우선 국내 결혼 정보회사에 회원으로 등록해 많은 상담을 받아 보고 감을 잡았다고 한다. 자신이 선을 본 남자만 해도 족히 200명은 넘을 것이라고 말하는 최 대표.이후 자신의 지인들에게 사람을 소개시켜 주며 노하우를 쌓았고 드디어 2005년 결혼정보회사를 차리게 되었다.  “다른 사람은 못해도 영희씨는 잘할 겁니다”라는 말을 듣고 희망이 생겨 물 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다는 그는 힘이들때면 탈북하던 당시를 떠올리며 '영희야 너는 여기서 물러설 권리도 주저할 권리도 없어, 후회 해서도 안되. 니가 선택한 길이잖아'라고 혼자만의 구호를 외친다고 한다. 현재 최 대표는 남남북녀의 인연을 찾아주기 위해 주말조차 쉬지 못 할 정도로 바쁘게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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