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자 © 매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사회가 한참 시끄럽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기 위한 조건, 그중에서도 삶의 안정을 위하여 필수적인 조건 중 하나는 주거안정이다. 흔히들 이야기하듯이 넓은 대한민국에 내 집 하나 마련이 얼마나 어렵던가.
유독 전 세계적으로 한국에서만 널리 활용되고 있다는 전세제도(정확히 표현하면 차임 없이 보증금만으로 구성된 임대차라는 의미일 것이다)는 법적인 의미를 넘어, 재산을 불려가는 하나의 재테크수단이었다. 즉, 내 집을 사는데 필요한 목돈을 마련할 때까지 전세금(보증금)을 불리며 옮겨 다니며 살다가 대출로 잔여금을 치를 수 있는 시점이 되면 그간 월세를 소모하지 않더라도 집을 마련할 수 있는 하나의 좋은 방법이었던 것이다.
위와 같은 전세제도의 활용이 가능하였던 것은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부동산 가격도 자연스럽게 상승되어 가치를 유지하여 왔고, 웬만한 경기변동에도 가격이 안정적으로 유지되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최근 부동산 가격이 크게 출렁이면서 시장가치를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게 되었고, 특히, 아파트 외 형태 다세대, 빌라 등 신축주택들은 그 시장가격을 측정하기 어려워 보증금이 실제 매매대금을 넘겨 책정되는 경우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즉, 과거에는 세입자가 계약이 끝날 시점에 이르러 ‘과거 보증금과 같거나 더 많은 보증금을 지불할 새로운 임차인’이 나타나는 게 일반적이었고 정 상황이 안되면 경매를 통해서라도 보증금을 회수할 수 있었지만, 최근 몇몇 신축주택의 경우 새로운 세입자가 과거 보증금 이상을 지불하려 하지 않거나 경매에 부치더라도 보증금 이하로 낙찰되어 임차인이 보호받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진 것이다.
나이가 들어 깨닫게 된 것이 있다. 부동산을 구매할 때 ‘나중에 쉽게 되팔 수 있는지 여부’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세도 마찬가지다. 나중에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집 구하기도 빠듯한데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 있을까.
2달 정도 전에 법률상담을 했다. 문의자는 신축인 데다가 매우 깔끔하고 TV, 세탁기, 냉장고 등 삶의 필요한 살림살이까지 풀옵션으로 갖춰진 다세대를 본 후 너무나 마음에 들어 그 자리에서 계약했다. 그런데 돌아와 생각해보니 보증금은 지나치게 높았고 계약서를 천천히 읽어보고 있자니 자신에게 너무나 불리한 것 같아 계약금 몰취 없이 계약을 파기하고 싶어졌다.
읽어보니 계약서의 의도가 다분히 느껴졌다. 현재 신탁재산으로 되어 있는 임대물건, 신탁된 부동산이라는 사실도 알려주지 않고 신탁원부의 존재 자체도 알려주지 않는 중개업자, 위탁자 명의로 작성된 임대차계약서, 중개업자가 자신을 임대인의 대리인이라 주장하지만 첨부되지 않은 위임장, 특약사항에 기재된 곧 임대인이 변경될 것이라는 고지, 아직 서른도 되지 않는 새로운 임대인, 임차인이 모든 임대조건을 이해하고 계약을 체결하였다는 취지의 문구···. 당시 상담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보는 순간 영 내키지 않았던 기분은 지금도 남아있다.
위와 같은 상황이라 해서 모든 사례가 그런 것은 아니겠다. 하지만 건축주가 분양회사(또는 중개업자)와 결탁하여 매매가격에 근접한 또는 그 이상의 전세금으로 주택임대를 하는 동시에 그 주택을 전혀 재산이 없는 새로운 매수인에게 넘겨 초기 작업자들은 유유히 빠져나가는 방식이나 임차인을 보호하고자 만들어진 주택임대차보호법 제3조 제4항을 역이용하여 건축주가 건축비와 이윤을 회수하고 중개업자는 수수료를 버는 신기한 구조 등이 가능하다.
지금 당장은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겠지만 해당 주택의 감가를 고려하면(향후 매매가격에 한참 못 미치는 가격에 낙찰되거나 유찰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2년 후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는 이유만으로 잠자코 기다리기에는 위험이 너무 컸다. 다행히, 운 좋게도 문의자의 적극적인 대처로 해당 사안은 상담만으로 해결이 되었다.
새삼스럽게 느낀다. 화려한 것은 독이 있다. 그리고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게 다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살펴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