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 기고 | 오래전 소설가 윤대녕의 ‘그를 만나는 봄날 저녁’이라는 단편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주인공은 일종의 권고사직을 당한 전직 회사원이다. 회사생활을 정리하면서 200매가 넘는 명함을 발견한다. 물론 명함속의 인물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흥미로운 것은 주인공이 그 중 무작위로 고른 명함의 인물에게 무작정 전화를 걸어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명함 외에는 서로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다. 서로를 모르는 서먹함에도 불구하고 알던 사이처럼 자연스럽게 술을 마시고 당구도 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급기야 이들은 가족이나 동료에게도 털어놓기 어려운 이야기를 서로에게 털어놓기 시작한다. 명함을 매개로 장난처럼 이루어진 만남을 통해서 작중 인물들은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보며 서로를 위로한다.
출근길에 명함을 많이 받는 요즘이다. 오는 4월 10일 실시되는 국회의원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함은 후보자의 작은 우주나 마찬가지다. 잘 나온 사진과 본인을 어필하는 내용을 빼곡하고 정성스럽게 담아놓았다. 자신을 가장 빠르고 쉽게 알리는 데 명함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주목할 점은 명함을 주고 받지만 서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명함 밖 현실에서 그들의 맨 얼굴은 어떨까.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일까. 아니면 자신을 숨기고 한 표를 얻기 위해 그럴듯한 명함으로 가면을 쓴 사람일까. 소설속에서와 같은 일이 현실에서도 일어날 수 있을까. 무작정 연락해도 나의 고통과 아픔에 귀기울여주는 정치인을 만날 수 있을까. 삶에 지쳐 위로받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 요즘이다. 선거에서의 승리만을 외치는 그들의 날선 목소리는 여전히 피로하다. 지친 국민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치유의 선거가 되기를 소망하는 것은 지나친 기대일까. ‘그를 만나는 봄날 저녁’과 같은 설렘이 가득한 4월 10일을 꿈꾸며 문득 명함 하나를 바라본다.저작권자 © 매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