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어떻게 주권국가에 구멍을 뚫어
민주주의 없는 자본주의의 요새를 만드는가?
매일일보 = 김종혁 기자 |
시장을 위한 완벽한 공간을 찾으려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을 추적한
현대 자본주의 역사 연구의 걸작
보스턴대학교 역사학 교수이자 전작 『글로벌리스트』로 학계와 언론의 뜨거운 주목을 받고 있는 역사학자 퀸 슬로보디언의 신간, 『크랙업 캐피털리즘』이 출간됐다.
이 책에서 슬로보디언은 시장을 위한 완벽한 공간을 찾으려는 시장급진주의자들의 역사를 추적하고, 그들이 사용하는 ‘구역’이라는 전략을 폭로한다.
구역(zone)이란 (경제특구나 수출가공구처럼) 경제적 필요와 자본의 요구에 따라 국가의 규제나 민주적 절차에서 예외적으로 벗어나 있는 공간으로, 슬로보디언은 시장급진주의자들이 세계 곳곳에 구역이라는 ‘구멍’을 뚫어 자본의 탈출구를 건설하려 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신간에서 이러한 시도를 크랙업 캐피털리즘, 즉 ‘균열(crack up)의 자본주의’라 명명한 그는 가장 대표적인 구역이라 할 수 있는 홍콩과 싱가포르에서 시작해 런던, 실리콘밸리, 두바이, 소말리아 그리고 메타버스까지 차례차례 파헤친다.
『크랙업 캐피털리즘』 한국어판에는 한국어판 특별 저자 서문이 추가되어, 재벌과 국가의 긴밀한 협력에서 출발한 한국형 크랙업 캐피털리즘을 소개한다. 경제 논리를 앞세워 등장하고 있는 구역이 함의하고 있는 자유지상주의 정치를 파악한다면,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국가의 중요성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지상주의를 향한 열망은 왜 사라지지 않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라는 제약’에서 탈출할 수 있다면? 국가 규제나 민주적 절차를 모두 제거한 ‘시장을 위한 완벽한 공간’을 건설할 수 있다면? 만약, 프랜차이즈 기업이 프랜차이즈 국가가 될 수 있다면? 1인 1표제 대신 지분을 많이 가진 주주의 뜻대로 국가를 운영할 수 있다면? 그리고 만약, 이런 일이 이미 벌어지고 있다면?
초국가적 제도를 이용한 전 지구적 운동으로서 신자유주의의 역사를 파헤친 『글로벌리스트(Globalists)』로 일약 학계와 언론이 주목하는 역사학자로 떠오른 퀸 슬로보디언이 다음 행보로 시장급진주의자들의 역사를 추적한 책을 내놓았다.
출간 직후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포춘》 선정 2023년 올해의 논픽션에 오른 『크랙업 캐피털리즘』에서 슬로보디언은 역사학자다운 집요함으로, 주권국가에 ‘역외 구역’을 만들어 “민주주의 없는 자본주의”의 유토피아를 만들어 온 시장급진주의자들의 역사를 그려 냈다.
이를 통해 지난 세기부터 지금까지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와 함께 발전해 왔다는 기존의 통념을 뒤집고, 세계는 통합을 향해 나아갔다는 고정관념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유럽연합 등으로 한쪽에서 통합이 추진되어 왔다면 한쪽에서는 분리와 예외를 향해 나아갔다. 세계 곳곳에 만들어진 경제특구, 수출가공구 등 이른바 ‘구역(zone)’들이 그런 움직임을 대표한다.
슬로보디언은 이렇게 주권국가에 ‘구역’이라는 ‘구멍’을 뚫어 주권국가의 간섭이나 민주주의의 압력에서 벗어나 자본의 탈출구를 만들려는 움직임을 크랙업 캐피털리즘, 즉 ‘균열(crack up)의 자본주의’라 명명한다. 그리고 가장 대표적인 구역이라 할 수 있는 홍콩과 싱가포르에서 시작해 런던, 실리콘밸리, 두바이, 소말리아 그리고 메타버스까지 시장급진주의자들의 열망이 쏟아진 곳을 차례차례 파헤친다.
그 역사적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때로 우스꽝스러울 정도인 시장급진주의자들의 움직임이 민주주의와 주권국가에 얼마나 큰 위협이 되는지 알게 된다.
『크랙업 캐피털리즘』 한국어판에는 한국어판 특별 저자 서문이 추가되어, 소수의 대기업 가문과 대규모 발전주의 프로그램을 추진한 국가의 긴밀한 협력에서 출발한 한국형 크랙업 캐피털리즘을 소개한다.
경제 논리를 앞세워 등장하고 있는 구역이 함의하고 있는 자유지상주의 정치를 파악한다면, 2008년 금융위기가 발생한 지 20년도 지나지 않은 오늘날, 급진적 자유주의라는 또 다른 유령이 끝없이 전 세계를 배회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국가의 중요성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지상주의를 향한 열망은 왜 사라지지 않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발전에 민주주의는 거추장스러울 뿐?
균열을 일으키는 자본주의, 크랙업 캐피털리즘
세계 곳곳에 만들어진 자본의 유토피아, 구역을 찾아서
전 세계에는 약 5400개 구역이 존재한다. 지난 10년 사이에만 새로운 구역 1000여 개가 생겨났고 어떤 구역은 창고보다도 작다. 이런 구역은 일종의 역외 지역으로, 그 구역이 속한 국가의 법률이나 규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규칙 아래에서 운영된다. 즉 세금이 적거나 없고, 고용과 해고가 자유로우며, 규제가 없고, 민주주의 또한 없다. 일종의 ‘자유시장 유토피아’인 셈이다.
슬로보디언은 구역을 ‘구멍’에 비유함으로써 자본주의가 민족국가의 영토에 구멍을 뚫어서 민주적인 관리 감독이 없는 예외 구역을 만들어 내고 있는 현상을 설명한다. 그리고 세계 곳곳에 이런 구멍을 내는 시장급진주의자들의 역사를 재구성해 낸다.
밀턴 프리드먼부터 피터 틸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시장 급진주의자들이 자본주의를 위한 완벽한 공간을 찾는 과정을 따라간다.
그 시작은 구역의 선지자이자 원형이라 할 수 있는 홍콩이다. 슬로보디언은 노조도, 대중 선거도 없지만 금융 기밀주의는 강력한 홍콩이 세계 자본의 중심지로 부상하는 과정을 빠르게 훑는다. 특히 중국 반환 이후에도 홍콩에서는 정치적 자유보다 경제적 자유가 우선시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이러한 홍콩 모델이 중국 선전 지역으로 유입되면서 ‘구역 열풍’이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밝힌다.
홍콩과 같은 구역은 매우 다양한 곳에, 다양한 형식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슬로보디언은 크게 섬, 부족, 프랜차이즈 국가라는 의미심장한 세 부류로 나누어, 구역을 향한 움직임을 분석한다. 섬으로는 싱가포르, 런던 안의 카나리워프가 대표적이다.
홍콩과 싱가포르가 문자 그대로 섬이라면, 카나리워프는 육지 안의 섬이다. 홍콩과 싱가포르가 정치적 자유 없는 경제적 자유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사례, 권위주의와 시장이 결합한 사례라면 카나리워프는 홍콩과 싱가포르로부터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기획된 공간이다.
부족 범주는 슬로보디언의 통찰이 더욱 빛나는 분류다. 슬로보디언은 법률적 합의와 공동 거주를 통해 배타적인 집단을 이룬 사례들을 분석한다.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남아공의 인종 분리 지역인 반투스탄에서 추진된 시장급진주의자들의 움직임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 뒤를 이어 미국에서 추진된 인종차별적인 백인 중심 분리독립 운동, 극소국가 리히텐슈타인이 조세회피처가 되기까지 군주 한스아담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변화에 대한 분석이 이어진다.
프랜차이즈 국가라는 범주 역시 흥미롭다. 슬로보디언은 소말리아처럼 중앙정부가 없다시피 한 국가와, 두바이처럼 권위주의 정부가 나서서 국가의 기업화를 추진한 사례를 차례로 분석한다.
또한 마다가스카르섬, 온두라스, 에스토니아 등지에서 펼쳐진 무정부 자본주의 실험까지 추적한다. 그리고 마침내 영토성을 벗어나 ‘메타버스’라는 가상 세계에까지 손을 뻗은 시장급진주의자들의 끊임없는 시도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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