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3대 왕 태종 시절.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던 직업정신 투철한 사관이 임금이 궐내를 걷다 헛발질한 것을 실록의 기초 자료가 될 사초에 적었다.
임금이 “제발 지워달라”고 사관에게 부탁하자 사관은 ‘왕이 길을 걷다 헛발질하다. 헛발질한 것을 적지 말라고 말한 것은 적지 말라 명하셨다’고 적었다. 이렇게 전해오는 ‘이야기’는 진귀한 보물로 다가온다. 위엄 있는 왕이 기록 하나에 쩔쩔매는 모습은 생소하지만 재미있는 야사다.
이처럼 재미로 들을 수 있는 기록이 있는가하면 문장화 되어 보존된 기록으로 후폭풍을 만든 사례도 있다. 사초에 기록한 몇 줄의 문장을 이유로 반대파 대신들을 대거 숙청해버린 연산군 시절의 무오사화가 그렇다. 기록하는 ‘사람’은 그래서 중요하다.
행정안전부(이하 행안부)는 2009년 12월 22일과 2010년 1월 6일 그리고 2월 9일에 걸쳐 ‘행정내부규제개선 회의’를 열었다. 기록관리전문요원의 자격요건 완화 및 배치 유예가 회의의 핵심 주제였다. 국무총리실에서도 ‘선진화 과제 발굴회의’로 기록관리 전문요원의 자격기준완화 및 지자체 배치 시기 연기에 대해 논의를 진행했다. 기록물 폐기 및 비공개 기록물의 공개재분류 등 기록관리 절차를 간소화하고, 기록물의 체계적인 관리를 위해 현재 전문 교육과정을 이수한 석사이상으로 되어있는 전문요원의 자격요건을 완화하자는 내용이 회의의 주된 골자다.‘기록관리전문요원’에서 ‘전문’ 빼자?
현행 『공공기관의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이하 기록관리법)에 따라 기록관리전문요원들은 ‘기록관리학 석사학위 소지자’라는 자격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추진되고 있는 기록관리법 시행령개정 논의에서는 이러한 조항을 삭제하거나 3년에서 5년간 삭제 유예를 검토하고 있다. 또한 기록관리요원들의 자리에 실무경력이 있는 공무원을 기록관리 전문요원으로 임용 가능하도록 조치할 것이라고 한다. 시행령 개정안에 올라와있는 또 다른 조항은 1년에서 3년 동안 보존해야하는, 상대적으로 가치가 낮은 기록물에 대한 폐기절차를 간소화하여 각급 기관의 기록물 관리를 효율화한다는 것이다.요원 자격 완화·기록물 폐기절차 간소화 등 시행령 개정 날선 공방
‘경제 살리기’가 우선? 기록관리연구원 “전문성포기는 개혁 아니다”
전문성 vs 효율성?
행정규제완화논의에 대해 한국기록관리연구원(이하 연구원)은 지난 8일 ‘전문성포기는 규제개혁이 아니다’라는 성명서를 냈다. 정부와 행안부가 기록관리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행정편의주의적인 발상을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연구원 측은 폐기 간소화를 위해 보존기간 3년 이하의 기록물을 외부 전문가가 참여하는 심의 절차 없이 폐기할 수 있도록 법령을 개정하는 것에 대해서 “행정기관 내 임의적인 기록물 폐기를 불러 올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연구원은 “전문요원의 의견 반영을 거치지 않고 폐기된다는 것은 곧 기록물의 행정적 가치만을 고려해서 폐기 대상이 될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며, 특히 “비공개 기록을 5년마다 공개 여부를 다시 검토하도록 한 규정을 삭제한 데에 대해서는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연구원 측은 “업무를 전문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기록물 관리 전문요원의 자격을 석사학위자 이상으로 규정한 것이 규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기록관리에 대한 전문성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다.이에 대해 행안부 관계자는 18일 <매일일보>과의 전화인터뷰에서 “논의과정에 학계와의 의견수렴을 충분히 거치지 못한 점은 아쉽게 생각하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기록물관리에 대한 논의는 효율적 업무처리를 위해 필요한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현재 3단계로 규정된 보존기록물의 폐기절차를 2단계로 축소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보존가치가 낮은 1,3년의 기록물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라며, “수요조사에서 실무자의 경험상 1~3년 보존기록물의 경우 폐기되는 경우가 많고 각급기관의 행정력을 낭비한다는 지적이 많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 ‘혁명’은 미완의 ‘혁명’이었다. 정권이 바뀌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0개월 전인 2008년 7월부터 시작된 ‘대통령 기록물 유출 논란’과 그해 12월 국회에서 통과된 ‘쌀 직불금 문제 관련 대통령지정기록물 공개안’은 국가기록물 제도를 누더기로 만들었다.
‘이런 식이면 어떤 대통령이 기록을 제대로 남기겠느냐’는 지적이 봇물처럼 쏟아졌고, 이명박 정부 들어서 사회 여러 분야에 걸쳐 ‘퇴행’이 진행된 가운데 특히 국가기록물관리체계 후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터뷰]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정진임 간사
“전문요원의 현장배제는 투명성 포기”
“기록관리전문요원은 기록물 인생의 코디네이터…가치 인정해야”
- 기록관리전문요원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나
△ 기록관리전문요원은 기록에 있어서 전 생애를 책임지는 사람이다. 기록의 탄생에서 폐기까지 함께한다. 아이를 낳은 뒤 출생신고를 하지 않으면 서류상에서 인정을 받을 수 없듯이 기록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기록을 관리하는 일을 기록관리전문요원이 맡고 있다. 관리가 되지 않으면 정보의 사용도 이루어질 수 없다. 정보가 곧 힘이 되는 현대 사회에서 기록관리전문요원은 더욱 전문성을 띄어야 한다.
- 교육기관의 수는 얼마나 되나?
△ 전국에 20여개 대학원이 있다. 기록관리법 제정 후 관련 교육기관들이 생겼고, 정부에서 교육하는 기관도 있다.
- 기록관리법이 존재하지만, 사실상 전국에 전문요원이 배치 되어있지 않다고 들었다.
△ 현재 정규직으로 등록되어 있는 곳은 정부 부처와 서울시뿐이다. 지자체의 경우 상근하는 기록관리전문요원보다 시간제 계약직으로 근무하는 요원이 대부분이다. 여기서 문제점이 발생한다.
비정규직으로 주 3일 근무하면서 기록관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수직적 공무원 사회에서 상사가 기록을 폐기하라고 하면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있겠나. 더군다나 입맛에 맞지 않으면 해고해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기록은 그렇게 관리되어서는 안 된다.
- 현재 논의되고 있는 기록관리에 대한 행정규제완화 논의 중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어떤 조항인가?
△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요원의 자격요건 완화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자료일지라도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기록의 보존성은 상대적이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요원과 행정적인 시각에서 보는 기록물의 보존 가치는 다를 수 있다. 다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요원을 현장에서 제외시킨다는 것은 이러한 기록물관련에서 정부가 투명성을 포기한다는 말이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