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 업황 분석 실패…당국 '눈치 보기'도 작용
[매일일보 이경민 기자] 조선업에 대한 구조조정이 다가오면서 국내 은행권이 조선업에 대한 여신을 대부분 ‘정상’으로 분류해 놓고 있어 ‘충당금 공포’가 현실화되고 있다.대우조선해양,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등 조선 3사에 대한 은행권 여신은 50조원이 넘는다.
25일 금융권에 따르면 대우조선해양은 위험 노출액(익스포저)이 약 23조원에 달하지만 지난 3년 간 영업 활동을 통해 이자비용도 제대로 지불하지 못했다.이자보상배율이 1미만인 ‘한계기업’인 것이다. 다시 말해 그동안 빚을 내 은행 이자를 낸 셈이다.수출입은행이 12조6000억원으로 가장 많고, 산업은행이 6조3000억원, 농협은행이 1조4000억원 등 특수은행이 20조원을 넘는다.하나은행 8250억원, 국민은행 6300억원, 우리은행 4900억원, 신한은행 2800억원 등 주요 시중은행의 대출규모도 2조2000억원을 웃돈다.이 회사의 무보증 회사채 신용등급도 ‘BB+’로 투자 부적격 등급을 받았다.‘수주절벽’도 지속되고 있다.올해 1분기 대우조선의 수주량은 현대삼호중공업(16만9000CGT)보다도 적은 16만8000CGT였다.이처럼 ‘경고음’이 잇따랐지만 채권은행들은 대우조선의 여신을 대부분 ‘정상’으로 분류해 놓고 있다.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이 대우조선의 대출을 ‘정상’으로 분류한 데다 비록 빚으로 연명할지라도 대우조선이 이자를 은행 측에 꼬박꼬박 내고 있다는 이유에서다.시중은행 중에는 유일하게 국민은행만 지난 3월부터 대우조선의 여신을 ‘요주의’로 분류해 놓고 있다.정상은 충당금을 거의 쌓지 않지만 요주의부터는 상당한 충당금을 쌓아야 한다.
요주의는 대출 자산의 7~19%, 고정은 20~49%, 회수의문은 50~99%, 추정손실은 대출액의 100%를 충당금으로 쌓아야 한다.예컨대 대우조선해양을 ‘정상’에서 ‘요주의’로만 분류해도 은행권은 1조6000억원에서 4조3000억원의 충당금을 더 쌓아야 한다.특히 여신의 대부분이 몰린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은 많게는 3조원이 넘는 금액을 충당금으로 적립해야 한다. 이에 따라 시중은행들은 올해 2분기에도 조선·해운업과 관련해 거액의 충당금을 쌓을 것으로 보인다.우리은행은 대우조선해양을 ‘요주의’로 분류해 조선사에만 1000억원을 쌓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지난 1분기에만 해운·조선사 등에 3328억원의 충당금을 쌓은 농협은행은 2분기에도 거액의 충당금을 쌓을 가능성이 상당하다.상황이 이렇다 보니 은행들은 조선업계의 업황이 형편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충당금을 쌓을 돈이 없어 등급조정을 못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은행들은 구조조정 위기에 내몰린 현대중공업이나 삼성중공업에 대한 여신도 같은 이유로 ‘정상’으로 분류해 놓고 있다. 현대중공업에 대한 은행권의 대출규모는 17조4000억원, 삼성중공업은 14조4000억원에 달한다. 따라서 이들 기업이 법정관리 등으로 치달아 대출 채권이 부실화하면, 최악의 경우 30조원이 넘는 부실이 생길 수 있다.대부분의 시중은행이 연체율 등 단순 지표만 들여다보고, 현금 흐름이나 업황에 대한 분석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금융당국에 대한 눈치 보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손상호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작은 회사라면 은행들이 진작에 여신등급을 낮췄을 터지만 당국의 눈치를 보느라 여신등급 조정을 미뤘을 것”이라며 “현실적으로 대우조선해양 같은 대기업의 여신은 은행들이 함부로 결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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