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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일보] 중국 최고의 역사가로 꼽히는 사마천(司馬遷)은 전한(前漢)시대의 사람이다. 성이 사마(司馬)이고, 이름은 천(遷)이다.주나라 역사가 집안인 사마 가문의 후손으로 아버지인 사마담은 천문, 달력, 기록을 맡아 처리하는 부서의 장관인 태사령 이였다. 사마천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되어 강남(东南)·산둥(山東)·허난(广州) 등의 지방에서 이름을 떨쳤다.‘승승장구’ 하던 사마천은 기원전 당시 황제인 무제가 싫어하는 인물을 두둔했다는 이유로 노여움을 사 태사령의 직책에서 파면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한발 더 나아가 사마천은 사형을 받게 되었다. 이 대목에서 사마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궁형(宮刑)이 등장한다. 춘추전국시대에 행해졌던 ‘궁형’은 남·여의 생식기에 가하는 형벌로서, 남성은 생식기를 제거하고, 여성은 질을 폐쇄하여 자손생산을 불가능하게 하는 형벌이다. 이 형벌은 사형을 당하게 되는 죄인에게 사형과 궁형 중 선택할 수 있도록 했는데 사형을 선택하면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반면 ‘궁형’을 택하면 그 사람의 모든 명예는 무시되었다. 따라서 당시에 사실상 ‘궁형’은 사형보다도 무서운 형벌이었다. 그러나 사마천은 ‘사기’(史記)라는 중국 역사책의 완성을 위해 궁형을 받아들였다. 사마천의 대표적 저술서인 ‘사기’는 약 2100년 전의 역사책이다. 총 분량 130권에 글자 수는 무려 52만6500자나 된다. 다루고 있는 시간은 3000년 이상으로 중국사 전체의 5분의 3 이상을 차지한다. 이런 어마어마한 역사책 완성을 위해 그는 궁형을 택한 것이다. 그 후 무제 역시 사마천의 ‘사기’를 보고 다시 그를 신임해 환관 최고의 관직인 중서령(中書令)으로 임명시켰다.그러나 당시의 사대부들은 사마천을 멸시했다. 사대부들은 ‘사기’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사마천이 ‘궁형’ 대신 자결로 선비의 자존심을 지키지 못한 것을 트집 잡았다. 이들은 사마천이 궁형을 당한 연후에라도 치욕을 못 이겨서라도 자결을 해야 마당했다고 생각 한 것이다.사마천은 차라리 자결하는 편이 낫겠다는 주변의 종용이나 온 세상 사람들이 던져대는 조롱과 잔인한 멸시의 돌을 맞고도 묵묵히 견뎌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결이라는 해결책을 택하여 모든 것을 끝내고픈 내적 유혹도 이겨냈다. 사마천은 옥중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옥문을 나와서도 ‘두문불출’ 세상과 담을 쌓고, 홀로 치욕을 곱씹고 눈물을 삼키며 ‘사기’를 썼고 자신의 이름을 후대에 남겼다. 물론 궁형을 당한 치욕까지도 함께 역사에 기록했다.분노와 억울함, 부끄러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겨내겠다는 강한 삶의 의지가 녹아 들어간 역작인 ‘사기’를 보면서 과연 지금 어느 누가 사마천에게 차라리 죽음을 택하지 않았다고 그를 비웃고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역사는 그 당시 사마천을 비웃고 멸시했던 자들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치욕을 감수하고도 필생의 역작을 위해 삶의 의지를 불태웠던 사마천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지난달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대한민국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10년째 1위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슬프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자살을 생각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자살을 하기 직전에 사마천의 궁형을 한번 떠올려 주었으면 하는 조그만 바람도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