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왕실의 영혼 "조선왕릉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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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왕실의 영혼 "조선왕릉을 만나다"
  • 김종혁 기자
  • 승인 2016.07.11 10: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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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일보 특별기획> 세계유산 조선왕릉 40기 시리즈 기획 연재
[매일일보]는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최종덕)과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최맹식), 조선왕릉관리소(소장 남효대)가  지난 6월21일부터 오는 8월 28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조선왕릉, 왕실의 영혼을 담다」 특별전을 개최함에 발 맞춰 세계유산 조선왕릉 40기를 기획,연재한다. - 편집자주>

조선왕릉은 전쟁 등 역사적 시련 속에서도 대부분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역대 통치자의 무덤이 이토록 완벽하게 남아 있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역사성과 인류문화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대한민국에 소재한 조선왕릉 40기(북한에 소재한 2기는 제외)가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조선왕조 역대왕들의 재위순서에 맞춰 "특별전 전시기간 중" 조선왕릉 시리즈를 연재 한다

-조선 건국의 혼, 제 1 대 태조 이성계 건원릉에 잠들다-

조선건국시조 태조 이성계 건원릉 능침, 이하 사진=문화재청

-건원릉 억새풀 이야기, 돌보지 않은 듯한 태조의 능-

건원릉을 제외한 다른 조선왕릉의 봉분은 푸른 잔디가 덮여 있으며 반듯하게 손질되어 있다.  그런데 조선을 세운 태조의 위엄있고 웅장한 건원릉에는 언뜻 보면 마치 한동안 손보지 않아 잡초가 무성한 것으로 여겨질 만큼 잔디가 아닌 억새풀이 무성하다. 왜 그럴까?인조실록 1629년(인조7년) 3월19일의 첫번째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돼 있다. 능의 사초를 손대지 않은 다른 뜻에 대해 동경연 홍서봉이 인조임금에게 아뢰기를
억새풀이 돋아 있는 건원릉 능침
“건원릉 사초(莎草 : 무덤에 잔디를 입히는 것)를 다시 고친 때가 없었는데, 지금 능에서 아뢰어 온 것을 보면 능 앞에 잡목들이 뿌리를 박아 점점 능 가까이까지 뻗어 난다고 합니다.원래 태조의 유언에 따라 고향의 억새풀을 사초로 썼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다른 능과는 달리 사초가 매우 무성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무뿌리가 그렇다는 말을 듣고 어제 대신들과 논의해 봤는데, 모두들 나무뿌리는 뽑아버리지 않으면 안 되고, 사초가 만약 부족하면 다른 사초를 쓰더라도 무방하다고들 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식(寒食)에 쑥뿌리 등을 제거할 때 나무뿌리까지 뽑아버리지 않고 나무가 큰 뒤에야 능 전체를 고치려고 하다니 그는 매우 잘못된 일이다.

지금이라도 흙을 파서 뿌리를 잘라버리고 그 흙으로 다시 메우면 그 뿌리는 자연히 죽을 것이다. 예로부터 그 능의 사초를 손대지 않았던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였던 것이니 손을 대서는 안 된다.”고 억새풀로 봉분을 덮게된 내용이 기록돼 있다.

-고향땅에 잠들고 싶었던 조선의 창업주-

인조의 언급에서 처럼 태조의 건원릉에 잔디가 아닌 억새풀이 덮여있는 까닭은 태조의 특별한 유언 때문이다.태조는 조선을 건국하는 위업을 이뤘지만, 그 후 왕자들이 형제간의 살육을 마다하지 않으며 벌이는 권력 다툼을 겪는 등 무거운 마음의 짐을 안은 채 말년을 보내야 했다.승하하기 전 태조는 왕 이전의 한 사람으로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향 땅의 흙과 풀 아래 잠들고 싶은 마음을 유언으로 남겼던 것이다.

-능의 구성-

건원릉 곡장
건원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능으로,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고려 공민왕의 현릉(玄陵)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 왕릉에는 없던 곡장(담)을 봉분 주위에 두르는 등 세부적으로 석물의 조형과 배치 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능침에는 12면의 화강암 병풍석이 둘러싸고 있는데, 병풍석에는 십이지신과 영저 및 영탁 등을 새겼다. 병풍석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고, 난간석 밖으로는 석호와 석양이 네 마리씩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석호와 석양은 밖을 향하고 있는 형상으로 수호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봉분 앞에는 혼유석이 있는데,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 모양의 고석 5개가 놓여 있고 양 옆으로는 망주석이 한 개씩 서있다.중계에는 장명등과 석마 한 필씩이 딸려 있는 문석인이 놓여 있고,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가 양쪽에 놓여 있으며 가운데에는 정중석이 있다.
건원릉 정자각 보물 1741 호
혼유석(魂遊石)은 혼들이 무덤에서 나와 노는곳이라는 뜻을 가진 무덤앞 상석(床石)을 말한다.능 아래에는 정자각(보물 제1741호), 비각, 수복방, 수라간, 홍살문, 판위 등이 배치돼 있고, 비각 안에는 태조가 세상을 떠나고 태종대에 세운 신도비(보물 제1803호)와 대한제국 선포 후 태조고황제로 추존된 능표석이 세워져 있다.

-능의 역사-

1408년(태종 8년) 5월 24일에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6월 28일에 지금의 구리시인 양주 검암산에 능지를 정했다. 7월 말을 기하여 산릉 공사를 시작한 후 9월 9일에 발인했다. 산릉공사를 위하여 충청도에서 3,500명, 황해도에서 2,000명, 강원도에서 500명 등 총 6,000명의 군정을 징발했다. 태조는 생전에 두 번째 왕비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하여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에 본인의 자리(신후지지)를 미리 마련해두었으나 태종은 태조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였다.

-태조(太祖) 이야기-

건원릉 표석
태조( 1335- 1408)는 훗날 추존된 환조와 의혜왕후 최씨의 아들로 1335년(고려 충숙왕 복위 4년)에 화령부 사저에서 태어났다.태조는 고려 공민왕대에 쌍성총관부를 함락시켜 벼슬길에 올랐고, 1361년(공민왕 10년)에 홍건적의 침입 시 공을 세워 공민왕의 총애를 받았다. 우왕 즉위 후 명나라에서 철령 이북의 땅을 지배하겠다는 통보를 보내오자, 고려 조정은 요동을 정벌하여 이를 견제하고자 했고, 최영 중심의 찬성파와 이성계 중심의 반대파가 서로 대립하게 됐다.결국 최영의 주장에 따라 1388년(고려 우왕 14년) 요동정벌이 단행됐는데, 이성계는 이 대열에 합류했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반대파를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했다.이 후 정권을 잡아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했으나, 신진사대부의 추대로 1392년 음력 7월 16일에 개성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건원릉 신도비
이듬해에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했으며, 새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다지는데 몰두했다. 명나라와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사대정책을 썼고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내세웠으며, 농본주의를 통해 농업을 장려했다.그러나 제 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으로 아들들의 권력 다툼을 보게 되자 정치의 뜻을 버리고 정종(定宗)에게 양위한 뒤 태종 즉위 후엔 태상왕이 됐으며,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했다.1408년(태종 8년)에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세상을 떠났고,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년)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태조고황제'로 추존됐다. 


좌우명 : 아무리 얇게 저며도 양면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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