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언론노동조합 KBS 본부(KBS새노조)가 지난 1일부터 사측을 상대로 본격적인 파업 투을 벌이며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정권교체 후 ‘김비서’, ‘땡이뉴스’라는 조롱이 생겨날 정도로 친정부적 보도의 모습을 보여왔다는 지적을 받은 KBS의 파업소식에 여론은 현재 ‘KBS를 살리겠습니다’라는 캐치프라이즈를 내건 새 노조의 행보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새 노조는 어용노조라는 질타를 받아 온 기존의 KBS 노조에 반발한 기자와 PD를 중심으로 전국언론노조 산하에서 다시 새롭게 설립한 노동조합이다.
현재 900여명의 조합원이 가입한 KBS 새 노조는 엄경철(43) 위원장을 필두로 KBS의 언론의 비판정신과 저널리즘을 찾기 위해 필사의 투쟁을 벌이고 있다.
공영방송을 사수하라
지난 1994년 KBS에 입사해 17년간 기자로 활동해온 엄경철 위원장은 새 노조 출범식을 한 달 앞 둔 지난 2월 이내규 부위원장과 함께 위원장·부위원장 후보에 나란히 출마, “KBS를 향한 국민의 요구와 비판은 시간이 갈수록 더 큰 파도로 몰아치고 있고, 반대로 우리는 어떤 무기력에 시달리는 시린 세월을 겪고 있다”고 KBS의 위기를 역설했다.이어 그는 “새로운 KBS 노조는 ‘대단한 무엇’을 하고자 함이 아니라 KBS 조합원이면 누구나 아는 공영방송의 ‘원칙과 기본’을 다시 세우고자 한다”며 “조합원의 리더가 아니라 구심점이 돼 집단 지성의 촉매제로서 공영방송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새로운 노조의 힘을 만들겠다”고 공약했다.이후 엄 위원장은 2월 7일까지 열린 투표에서 KBS본부 조합원으로 가입한 총유권자 784명 가운데 662명이 참가한 가운데 찬성 99.8%(661표)의 압도적인 지지로 위원장에 당선됐다.후보에서 위원장으로 입지를 굳힌 그는 당선 후 인사를 통해 “안팎으로 권력에 의한 공영방송 장악 기도가 계속되고 있다. 공영방송이 그 기능과 역할을 상실하고 진실이 가려져 여론이 왜곡될 때 국민은 공영방송을 버리게 된다”며 “희생이 따르더라도 우리는 공영방송의 가치와 역할을 끝까지 지키고 싸워갈 것이다”고 당찬 각오를 밝혔다.“임단협 협상, 새 노조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싸움”
고개 돌린 KBS를 향한 새 노조의 인정투쟁
“노조 인정받아야, 비판저널리즘 억압하는 사측 견제”
“진정성 갖고 투쟁하면 국민이 노조 믿어줄 날 올 것”
“KBS를 살리겠습니다”
Q. 지난 2008년 정연주 前 KBS 사장 해임 이후 2년간 내부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나.
A. 지난 2008년 8월 8일 정연주 전 사장의 해임 날, 이를 막기 위해 일부 사원들이 저지싸움을 벌였으나 결국에는 막지 못했다.
같은 달 26일 이병순이라는 낙하산 사장이 KBS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 또한 막아내지 못했다.구심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조가 중심이 돼 싸워야 했으나 어용노조 성격의 한국방송노조가 이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결국 이병순 사장 취임 후 열흘 만에 부당인사가 행해졌다. 정연주 전 사장의 해임을 반대해 끝까지 저지싸움을 벌였던 일부 사원들에게 지방 인사발령이 내려진 것이다.
Q. 세 사람은 이미 징계를 받지 않았나.
A. 이미 징계를 받았음에도 또 다시 부당한 처분이 내려진 것이다. 정권에 비판적인 세력을 아예 퇴출하겠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이를 막기 위해 KBS 기자협회와 PD협회가 합동으로 무기한 제작 거부 투쟁에 들어갔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사측은 협회의 투쟁 돌입 10시간 만에 인사위원회를 열고 징계자들의 파면·해임처분을 철회하고 다시 각각 정직 4개월, 1개월로 징계수위를 낮췄다. 언뜻 보기엔 협회의 승리로 보였으나 실제로는 그게 아니었다. 징계 과정을 지켜본 사원들이 자신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질까 우려한 탓에 이 사건 이후 비판저널리즘이 사라졌다.비판저널리즘이 사라진 KBS는 수많은 비난과 지탄의 대상이 됐다. 국민으로부터 점점 신뢰를 잃고 외면을 받은 것이다. 단적인 예로 지난해 5월 노무현 서거시 KBS 취재진은 봉하마을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마을 밖에서 논밭을 배경으로 서거관련 소식을 전한 적 있다. 이때 KBS 기자들과 PD들은 엄청난 자괴감을 느껴야 했다.이러한 자괴감은 당시 보도국장에 대한 신임투표로 이어졌다. 결과는 ‘불신임’이 압도적이었다. 구속력 없는 투표였지만 당시 사원들이 사측에 얼마나 불만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예다.그러나 투표를 주도 했던 인물들에게 징계가 내려졌다. 최근엔 사측에 비판적이던 라디오국 PD 5명에게도 모두 지방 인사발령이 내려졌다. 한마디로 사측에 불만을 갖거나 비판적인 세력은 모조리 솎아내겠다는 의도이다.
이 와중에 지난해 말에는 탐사보도팀이 사실상 해체되면서 비판저널리즘의 마지막 보루였던 ‘시사기획 쌈’마저 폐지되고 KBS의 신뢰도 영역이 와해되더니, 급기야 지난 3월에는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열린음악회 녹화가 진행되기도 했다.
Q. 2년만의 파업이 때늦다는 지적과 밥그릇 지키기 싸움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있다.
A. 지난 2년간 정말 많이 싸워왔다. 앞서 말했듯이 부당징계에 반발해 제작거부투쟁도 해보고 신임투표 등을 통해 우리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투쟁을 이끌어줄 중심세력 없다는 것이었다. 즉, 노조가 조합원들의 힘을 한 데로 모으는 구심점이 돼야 하는데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기존의 노조를 깨고 새로운 노조를 설립하자는 목소리가 일었으나, 노조를 깬다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하나로 뭉쳐야 하는 시점에서 노조가 나뉜다는 것에 대해 분열주의 비판을 염려하기도 했다.그런데 지난해 11월 이명박 대통령 선거 특보 출신인 김인규씨가 KBS 사장으로 들어오면서 이를 저지하려던 노조의 파업이 부결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새 노조를 만들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게 됐고 결국 12월 16일, 기존 노조에서 탈퇴한 PD와 기자들을 중심으로 ‘전국언론노조 KBS 지부’를 만들게 됐고 올해 1월 ‘전국언론노조 KBS 본부’로 승인받았다. ‘밥그릇 싸움’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임단협 협상 결렬로 파업이 시작됐기 때문에 오해가 생긴 것 같다. 그러나 임단협 협상은 새 노조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싸움이다. 노조의 존재를 인정받아야 비판저널리즘을 억압하려는 사측을 견제할 힘을 얻게 된다. MBC를 예로 들자면, 사측의 억압이 있다고 해도 ‘PD수첩’이 계속해서 정권과 사회권력의 비리를 폭로하는 것은 MBC 노조가 이들의 자율성과 저널리즘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 KBS 새 노조의 임단협 싸움은 이러한 공정방송 싸움을 위한 교두보인 것이다. 국민들의 불신을 단 번에 씻을 수는 없겠지만 진정성을 갖고 싸우다 보면 언젠가 우리를 믿고 지지해 줄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Q. 이번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사측의 태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A. 지난 4일 KBS 2TV ‘해피선데이’를 통해 사측이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의 불법 파업으로 인해 하이라이트를 편집해 방송하고 있다’는 내용의 자막을 넣은 것을 봤다.
그러나 우리의 파업은 불법이 아니라 완벽한 합법이다.(실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지난 2일 KBS 새 노조에 '쟁의행위 정당성 검토 의견서'를 보내 "KBS 새 노조의 파업은 합법적인 쟁의행위"라고 밝혔다. 민변에 따르면 “쟁의행위가 정당하려면 '주체, 목적, 절차, 수단·방법' 4가지 조건이 정당해야 한다”는 판례를 들어 △KBS 새노조가 주체이고 △조합원 찬반 투표와 노동위 조정 절차를 이행했으며 △전면적, 배타적 점거 농성이 아니라는 점 △목적이 단체협약과 임금협약 체결을 위한 것 등을 들어 '정당하다'고 판단했다)이에 따라 지난 6일 전국언론노동조합이 언론중재위원회에 정정보도를 요구하는 중재를 신청했고, 향후 민형사상 소송을 진행할 예정이다.Q. 파업이 흐지부지하게 끝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A. 우리의 목표는 긴 싸움을 필요로 하는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목적이 있는 투쟁이다.
우리 파업의 목적은 임단협을 통해 노조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단협 싸움이며, 이것은 얼마든지 협상이 가능한 것이다. 단협싸움은 앞으로 KBS가 공영방송으로서 정권과 권력을 비판하는데 대한 압력을 견제하고 조합원을 보호할 수 있는 교두보이다.이것을 통해 독립성이 붕괴되고 저널리즘 정신이 무너진 KBS에 변화를 이끌어 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