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적인 교육으로 회귀할 교육감 선출에 기여할 것”소신 밝혀
[매일일보 차영환 기자] 올바른교육사랑실천운동본부(이하 올교실 상임대표 가용섭)가 지난해 11월24일 인천기독회관 7층에서 창립총회 및 출범식을 가진 가운데 올교실의 가용섭 상임대표와 참교육 실천에 관한 일문일답 인터뷰를 가졌다.
가 대표는 “학교 현장의 실질적 경험을 바탕으로 교육정책과 교육전문성을 통해 교육의 본질로 회귀할 수 있는 올바른 교육감이 선출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며 회원들의 올바른교육사랑실천운동의 참여에 대하여 참석자들에게 역설했다.
이어 "올교실은 앞으로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하고 교원의 전문성을 존중하고 학생들에게는 꿈을, 교사에게는 보람을, 학부모에게는 만족을 주는 교육의 장을 만들 수 있는 올바른 교육감을 선출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고 그 뜻을 밝혔다.
다음은 신년을 맞아 가 대표의 소신을 밝히는 인터뷰 내용을 정리해 본다.
Q. 올교실을 창립하게된 동기는?
A. 지난 4.15총선에 인천지역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한 한 후보의 자서전에서 전교조의 교육행태에 대하여 소상하게 알게 되었고 앞으로 교육현장이 이들로 인하여 생기는 많은 문제점들로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국가의 존폐도 장담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 두 번의 전교조 출신 교육감시대를 맡고 있는 인천만이라도 전교조가 아닌 분을 교육감후보로 내세워야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Q. 올교실이 지향하는 목적을 말한다면?
A. 앞서 말씀을 드렸듯 전교조가 아닌 교육감후보 단일화를 원한다. 지난번 선거에는 전교조 출신 현 도성훈교육감이 비전교조에서는 고승의, 최순자후보가, 그전 선거에는 전교조에서 이청연 전 전 교육감이 비전교조에서는 이본수, 안경수, 김영태후보가 출마를 하여 비전교조 후보들이 난립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로 인하여 지난 8월 실시한 전국 교육감 평가 조사에서 도성훈 인천시 교육감이 17개 시,도교육감 가운데 16위를 하는 등 인천의 교육현안이 암울한 상태에 있다. 그래서 나는 차기에는 꼭 단일화를 해야 하고 비전교조 교육감이 탄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Q. 항간에 인맥이나 조직으로 선거를 한다면 시장도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농담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인맥과 조직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A. 우선 인천에 살면서 40여 년을 많을 때는 26개의 모임에 참여를 하였고 각종 모임에서 매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회장이나 총무, 사무국장, 사무처장, 사무총장을 맡아서 봉사를 하였으며 많을 때는 한 해에 여섯 개 모임에 총무나 사무국장, 처장, 총장을 맡아서 봉사를 할 때도 있었다. 어느 모임이나 적극적인 참여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애경사에 상부상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지인들에게 자주 전화를 하고 문자나 카톡을 통하여 인사를 나누는 것이 인맥이나 조직을 관리하는 비결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Q. 인천에서 봉사왕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다고들 하는데 주로 어디에 어떤 봉사를 하였고 하고 있는지?
A. 봉사왕이라니 당치도 않다. 성경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 그러한 봉사가 진정한 봉사라고 생각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조용한 봉사를 하고 있었는데 말이 나왔으니 더 많은 사람들이 봉사에 참여를 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얘기를 하겠다. 43년 전에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소녀 가장 두 가정에 3년 동안 생활비 지원을 시작으로 보라매보육원, 향진원, 혜림원을 비롯한 여러 곳에 물질이나 노력 봉사를 하였다.
지금 하고 있는 전국소년소녀가장돕기인천시민연합 회장을 14년 동안 맡고 있으며 초창기에는 초등학생들에게 급식비 지원을 시작으로 생활비와 장학금을 비롯하여 쌀, 라면 등 생필품 지원하였고 인천시 각 구청에서 추천한 아이들에게 디딤돌씨앗통장을 통하여 매월 3만원씩 25명의 아이들이 적립을 할 수 있게 해 주었으며 지금은 아프리카 차드와 까보베르데의 아이들에게 매월 급식비로 50만원을 보내고 있고 현재 코로나19로 잠시 중단하고 있지만 '땅끝까지섬김회'에서 하고 있는 노숙인과 독거노인에게 매주 수, 금요일에 식사봉사를 하였고 이곳에 쌀, 라면, 부식은 물론 적지 않은 현금지원을 하였으며 솔직히 말해서 아직도 수도 없이 많은데 자랑질이 너무 지나친 거 같아서 그만하겠다고 손사래를 친다.
Q.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상도 받았다는데 간략히 소개를 한다면?
A. 인천시장상 5회, 보건복지부장관상 1회, 그 외 JC,라이온스클럽, 언론인글럽, 요식업중앙회, 사회복지회, 인하대학교, 인하대학교경영대학원, 충남도민회 등 30여개의 각종 사회단체에서 받은 상이 100개는 넘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중에 제일 기억에 남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상은 84년도부터 3년 동안 두 아이 가정을 도운 공로로 87년도에 숭의1동사무소에서 추천하여 당시 이재창 시장에게 받은 상이 제일 기억에 남고 소중하게 생각한다. 아마 이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꾸준히 봉사활동을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Q. 삶이 파란만장하시었다고 들었는데 지난날의 삶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이나 들려 줄 말이 있다면?
A. 나는 1955년 4월 15일 충남 태안의 바닷가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어린 시절 고생을 많이 하고 자랐다. 당시는 농업이 주류를 이루는 시대였고 농사처가 많지 않은 우리집은 다른 가정에 비해서 어렵게 살 수 밖에 없었다. 고향에서의 삶이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나는 당시 인천을 오가는 여객선 칠복호를 타고 무작정 인천으로 올라왔다.
청운의 꿈을 안고 올라온 인천이지만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어 직업소개소를 통하여 얻은 일자리가 동인천역 부근의 유흥업소였다. 이후 81년도 8월에 숭의동에 유흥업소를 차렸고 다음해 숭의4거리 다복아파트를 구입했고 포니1 승용차를 타게됐다. 88년도에는 대형업소를 포함 4개의 업소를 운영하게 되었고 8월 한 달에 아파트 4채에 해당하는 큰 돈도 벌어 보았다.
해외여행 자율화 이전에 해외여행을 다녔으며 당시에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 즐기던 골프도 하게 되었고 93년도에는 전국유흥업중앙회 감사에 당선되어 3년동안 감사로 재직도 하였다. 90년부터 96년까지 문화일보 인천지사장을 역임했고 90년 1월 14일에는 당시에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프로복싱 유명우 선수의 14차 타이틀 방어전을 인천에 유치하였고 장정구 대 소트치탈라타와의 14차 타이틀 방어전 유치때 거금 5천만원을 들여 계약을 했지만 장정구 선수의 일방적인 은퇴선언으로 게임이 무산되어 원금을 2년 뒤에 겨우 돌려받았다.
95년부터 97년까지 정당지구당의 수석부위원장 겸 후원회장을 역임하였고 95년 6.27지방선거에 인천시 의원에 출마하여 낙선하였으며 96~99년도에는 제2금융권인 대성신협에 감사로 봉사하는 등 98년 2월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개구리 올챙이 시절 생각을 못하고 정신없이 살았던 세월 이였다고 생각하지만 나의 지난날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Q. 비전교조 출신의 후보 단일화 방안에 대하여 앞으로의 계획은?저작권자 © 매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