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하원의원, “미 의회 연설하려면 신사참배 그만둬”
<그린 전 보좌관, “일본, 2008년 미 대선까지 해결해야”><日 내 반대 세력, “A급 전범들 분사하고 대체 추도하자”>
<한국 정부, “지켜볼 상황일 뿐 입장 표명할 문제 아니다”>
<미일동맹과 신사참배 문제는 별개, 결정은 고이즈미 몫>
[매일일보=김명은 기자] 재임 중 마지막으로 미국을 국빈 방문할 예정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 한국과 중국의 강력한 반발에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의 뜻을 굽히지 않던 그가 미국이라는 장애에 부딪혔다.
최근 미일군사동맹강화로 우호적 분위기를 연출하던 미일관계가 겉보기와 달리 예민한 부분이 있음을 드러내는 일이 벌어져 일본 정계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태평양전쟁에서 발단된 양국간 앙금이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모양이다. 미일관계의 돈독함을 과시하기 위해 추진 중이던 고이즈미 총리의 미 의회 연설이 한 하원의원의 반대 서한으로 제동이 걸린 상태.
한·중과 일본의 역사문제로 빗어지고 있는 국가간 갈등이 이번 일로 어떤 영향을 받을지 정부는 사태의 추이를 신중히 파악하고 있는 상태다.
고이즈미, 미 의회 연설 가능할까?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올 9월 임기 마감을 앞두고 내달 마지막 미국 방문을 계획하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긴밀한 미일관계를 과시하기 위해 일본 총리로는 사상 처음으로 미국 방문 중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하는 계획을 추진 중에 있다.
그런데 이 계획이 큰 암초에 부딪혔다.
헨리 하이드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 위원장(공화당)이 고이즈미 총리에게 미국 의회연설을 허용하는 조건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겠다는 뜻을 자진해서 밝힐 것”을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일본 <아사히 신문>은 미 의회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하이드 위원장이 지난 4월 말 데니스 해스터트 하원의장에게 서한을 보내 이 같은 요구사항을 전달했다고 전했다.
신문에 보도된 이번 내용은 일본 정계뿐만 아니라 아시아 주변국들에게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하이드 위원장은 서한에서 우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을 전적으로 지원해준 굳건한 동맹국 일본 정부의 대표인 고이즈미 총리의 의회 연설을 환영한다고 밝히면서도 총리가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간 뒤인 8월 15일에 야스쿠니 신사를 다시 참배할 가능성이 있다는 데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최근 한국과 중국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고이즈미 총리가 9월 퇴임 이전에 또 한 차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총리 본인도 이같은 추측을 전면 부인하지 않는 상황이다. 그리고 지난 8일 <니혼게이자>신문은 총리가 8월 15일 신사참배를 강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하이드 위원장은 고이즈미 총리가 미 의회에서 연설한 후 2차 대전 당시 진주만 공격을 감행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전 총리 등 A급 전범들에게 다시 경의를 표하는 것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진주만 공격 직후 연설했던 장소인 미국 의회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고이즈미 총리가 미국 의회에서 연설하고 돌아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것은 진주만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는 세대의 미국인들에게 우려를 넘어 모욕당하는 느낌을 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2차 대전 당시 미국인의 적이었던 전범들에 대한 고이즈미 총리의 경의 표현이 미국의 전쟁세대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이드 위원장 본인도 2차 대전 당시 필리핀 해전 등에 참전한 군인 출신이다. 그는 지난 가을에도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에 대해 “아시아의 대화가 저해되는 것은 유감”이라는 내용의 서한을 가토 료조(加藤良三) 주미 일본대사에게 보냈다.
그러나 하이드 위원장의 서한에 대해 해스터트 하원의장은 아직까지 어떤 답변을 내놓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내 비판 의견 만만치 않다
한편 미국 내에서 역사인식과 영토분쟁 등으로 일본이 한국 및 중국과 마찰을 빚고 있는 데 대한 경고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마이클 그린 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 담당 서임 보좌관은 12일 뉴욕에서 열린 강연에서 일본과 한국·중국의 마찰이 향후 미일동맹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그린 전 보좌관은 고이즈미 총리가 퇴임한 뒤에도 미일동맹은 양호할 것이라면서도 한중일 3국의 역사인식 차이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고 <요미우리>가 보도했다.
강연에서 그는 “일본은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때까지 이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이 문제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이 크게 네 가지로 나눠 있다고 분석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지지하는 강경파 △일본과 한중의 관계 개선을 바라지만 직접적인 개입은 자제하려는 부시 행정부 △친일파나 일본의 역할이 중요하므로 미국이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민주당내 우파 △미일 안보동맹 강화는 아시아에서 미국의 고립을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민주당 좌파 등이 그가 분류한 4가지 부류다.
한편 미국의 해양 정책 전문가인 마크 발렌시아는 최근 노틸러스연구소에 보낸 기고에서 “일본은 한국의 독도 영유권에 동의하고 대신 남북한은 독도를 배타적 경제수역(EEZ) 경계선 협상의 기점으로 삼지 않기로 동의해야 한다”는 해법을 제시했다.
고이즈미, 신사참배에 집착하는 이유
일본 전역에는 8만여 개의 신사가 있다. 그 중 가장 규모가 큰 곳은 도쿄 지요다구 왕궁 북쪽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다.
메이지 유신 직 후 세워진 이 곳에는 2차 대전 당시 진주만 공격을 감행했던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A급 전범 등 전범자 246만 여명의 위패가 안치돼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김은식 연구원은 <매일일보>과 전화통화에서 “사실 미국인들은 신사참배가 뭔지도 잘 모르는 측면이 있다”며 “동서양의 문화차이로 인해 제사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신사참배 문제는 크게 중요시 되지 않을 수 도 있다”고 말했다.
일본 보수 우파 세력은 침략전쟁을 일으킨 A급 전범은 연합국에서 일방적으로 규정한 것일 뿐 일본 국내법상으로 범죄자가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고이즈미 총리도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군국주의 부활을 우려하는 인접국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참배를 고집하고 있다.
물론 정치적으로 일본 내부 세력을 규합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는 것도 이미 알려진 분석이다. 일본 내 우익 세력을 결집하기 위한 정략적 차원에서 신사참배가 지속적으로 거론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사참배 문제는 9월 차기 자민당 총재 선거를 앞두고 일본 정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이와 더불어 하이드 위원장의 우려 표명과 별도로 일본 내 신사참배에 대한 반대 의견도 솟아져 나오고 있다.
우선 일본유족회장인 고가 마코토(古賀誠) 전 자민당 간사장이 야스쿠니 신사에서 A급 전범의 분사를 제의키로 해 주목받고 있다. 일본 언론은 그가 9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 맞춰 준비 중인 정책 제언에 이를 포함시킬 계획이라고 전했다.
그리고 일본 전국 100만 가구가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는 일본유족회가 자민당의 강력한 후원 단체라는 측면에서 고이즈미 총리측을 더욱 압박하는 수단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또한 고이즈미 정권에 비판적인 가토 고이치(加?紘一) 전 자민당 간사장은 하이드 위원장의 서한에 대해 “미국과만 잘하면 된다는 고이즈미식 외교가 정작 미국에서 업어치기 당하는 때가 온 느낌”이라며 “외교적 추태”라고 비난했다.
또 다른 자민당 의원은 “외국이 뭐라고 해서 태도를 바꾸는 것은 좋지 않다는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면서도 “이번 서한을 계기로 신사참배 문제가 총재 선거에 깊이 파고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본의 반응은
하이드 위원장의 서한에 대해 일본 정부는 애써 태연한 모습이다. 14일 <아사히 신문>에 따르면 일본 정부와 여당은 이번 서한에 대해 “현재로서는 한 사람의 의견”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보는 듯 하다.
외무성 관계자도 부시 행정부가 신사참배 문제에 직접 개입하겠다는 입장을 보인 적이 없음을 강조했다. 자민당 내에서도 이번 일이 “당장의 미일동맹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진 않는다”는 의견이 주류다.
그러나 이번 서한이 9월에 치러질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신사참배와 아시아 외교의 쟁점화를 가속화 시킬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외교통인 한 관계자는 “해스터스 하원의장이 총리의 연설을 막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일본 정부측 관계자가 결론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총리의 방미 일정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며 의회 연설을 미국측에 타진한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우리 정부는
하이드 위원장의 이번 서한과 관련한 보도가 나간 후 외교통상부는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북미과 한 관계자는 “정부가 어떤 입장을 내놓을 사안은 아니다”며 “앞으로 사태 추이를 지켜볼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한 “미국은 항상 시장경제질서와 인권을 중시하는 입장이다. 가치문제와 충돌하는 부분에서는 타협이 어렵다”며 일본의 어려운 상황을 지적했다.
김은식 연구원도 “이 번 일은 정부가 개입하기보다 미일 양국이 독자적으로 어떻게 해결해나가는지 지켜볼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미국은 그 동안 일본 정부의 반인륜 범죄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결의안들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적이 많았다”며 “상호 이익이 맞아떨어져 이루어지고 있는 미일군사동맹강화와 이 문제는 별개”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 번 일로 우리 정부가 반사이익을 얻을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어느 정도 일본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작용할지는 몰라도 우리 정부가 앞으로 중국과 일본의 관계에 더 큰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진 않는다”고 밝혔다.
고이즈미 총리는 그동안 일본 내 우익 세력 결집 등 정략적인 차원에서 신사참배를 강행해 왔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에 이어 미국 의회의 반대에 부딪히는 상황에 이르렀다.
미 행정부는 아직까지 이 문제에 대해 개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지만 미일동맹과는 다른 차원인 세계사와 인권문제 등에 대해 미국은 보편적 가치를 내세울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전망이다.
뿐만 아니라 A급 전범의 분사와 대체 추도시설 건립 등 일본 내 양식 있는 세력의 건설적인 제안도 봇물처럼 솟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재임의 마지막을 화홰와 평화의 물결로 장식할 것이냐 아니면 이웃과의 갈등 증폭으로 끝맺음 할 것이냐는 고이즈미 총리 본인의 뜻에 달렸다.
그러나 과거사에 대한 뼈아픈 성찰 없이는 전진할 수 없다는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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