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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일보] 사람은 누구나 올바르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고 행복한 삶일까? 올바르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자신의 마음과 행실을 가다듬는 것일까?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자기를 닦고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함인가?수신(休闲又修身-자기를 닦는 것)에 대해 대학에는 임금으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몸과 마음을 올바르게 닦아 수양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으로 마음이 바르게 된 뒤에 몸이 닦인다 하였다.우리들이 행복하고 올바르게 삶을 살아가려면 사람의 도리를 다해야 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고 웃어른을 공경하는 장유유서의 정신일 것이다.효에 대하여 세종실록에는 “사람의 자식으로 부모가 살았을 때는 효성을 다하고, 죽어서는 슬픔을 다하는 것은 천성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고 직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것이다”라 말하고 있다.명절이 돌아오면 옛날이야기 하나가 생각나곤 한다. 조선 정조 때의 문신으로 좌부승지를 역임한 김약련이 저술한 두암집에 있는 사람닭 이야기(人雞說)다. 이웃집에서 닭을 기르고 있었는데 어미닭이 자신의 새끼 닭을 몹시 사랑해 자신의 어미 닭에게서 먹이를 빼앗아 새끼 닭에게 먹였다. 다음해에 새끼 닭이 자라서 알을 낳아 병아리를 부화했다. 그러자 새끼 닭도 역시 자신이 부화한 병아리를 사랑하기를 어미 닭이 자기를 사랑하듯 했다.어느 날 어미 닭이 부엌 부뚜막 위에 흘려져 있는 밥알을 발견하고 쪼아 먹으려했다. 그때 새끼 닭이 달려와 어미 닭과 싸워 밥알을 빼앗아 자기가 부화한 병아리에게 먹이기를 마치 지난해에 어미 닭이 자신에게 한 것처럼 자신의 어미 닭과 싸우듯 했다.작년에 어미가 새끼를 기를 때 어미가 새끼에게 또 어미가 할미에게 한 짓을 하라고 시켰겠는가? 무릇 사람이라고 하는 자 또한 이 같은 자들이 있다. 부모의 은혜를 갚지 못하는 자들이 백에 백이지만, 그 자식을 사랑할 줄 모르는 자는 천에 하나 있을까? 사람들이 닭들과 같아서야 되겠는가? 만약에 닭과 같다면 그런 사람을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닭이라고 해야 하는가? 그런 사람들을 지칭해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사람닭’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라는 내용의 줄거리다.매년 추석이 돌아오면 생각나는 이 이야기는 어미 닭이 자신의 어미 닭이 먹을 먹이를 빼앗아 새끼 닭에게 먹이는 것을 보고 김약련이 느낀 심정을 기록한 것으로 자식사랑과 부모에 대한 효성을 비유한 글이다.그러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시대가 다양화되고 다변화된 탓에 차례를 휴가지에 가서 지내기도 하고, 추석과 구정의 명절에만 고향을 찾는 귀성전쟁을 벌이고 있다.아무리 우리들이 복잡하고 다양화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지만 평시에 부모와 조상께 참된 효를 실천한다면 명절에만 고향을 찾을 이유가 없다고 본다.부모님의 은혜는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넓다고 한다.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사회는 쇼셜미디어의 시대라 말하는데 현대의 우리들은 물질주의 팽배로 인한 가치관의 혼란, 잘못된 자녀교육관으로 인한 가정교육의 기능약화, 디지털미디어에 따른 잘못된 윤리관 등으로 인해 불안정한 사회에 살아가고 있다.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변화무쌍하고 급변하는 국제화, 정보화 등 사회변화의 소용돌이 속을 살아가면서 심리적인 갈등, 가치관의 혼돈 등을 겪고 있다지만 사람으로서의 진정한 참다운 도리는 실현돼야 한다.오늘의 세태는 웃어른을 공경하는 마음보다는 자기자식만을 과잉보호하는 부모들이 적지 않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발현된 지나친 자식에 대한 과잉보호는 비뚤어진 사고를 갖게 하고 버릇없는 자녀를 만든다.이제 부모가 자식에게 쏟는 맹목적인 사랑보다는 효를 근본으로 한 생활과 참다운 가정교육을 통해 타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생활해야 할 때라 생각한다.앞으로 우리는 참다운 효의 실천을 통해 가정에서 보고 느끼면서 배운 부모에 대한 사랑과 고마운 마음이 다양한 사회적 관계로까지 승화되어 부모에 대한 사랑인 효의 정신은 웃어른을 공경하는 장유유서의 정신으로 계승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