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변주리 기자] “못 살겠다 갈아보자!” 1956년 제3대 대통령선거 당시 민주당 신익희 후보(유세 중 뇌일혈 사망)의 선거구호이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꾸준히 들려오는 대규모 해킹 사건들로 거의 온 국민의 주민등록번호를 포함한 개인정보 일체가 중국 해커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못 살겠다, 주민등록번호 갈아보자”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행안부 상대 2차 소송…한상희 교수 “행정편의 이유로 직무유기”
생일·성별 등 민감한 개인정보 포함 주민번호제도 위헌소지 제기
지난 7월 발생한 네이트·싸이월드 개인정보유출 사건에 앞서 2008년 GS칼텍스 1150만명, 옥션 1080만명 등 유출 사건이 수차례 발생하면서, 현재 국민 대부분의 주민등록번호는 유출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네이트와 싸이월드를 상대로 개인정보유출에 따른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던 사람들이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평생 유출된 주민번호를 사용해야 할 수 없다며 주민등록번호 자체를 바꿔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이참에 생년월일, 성별 등 그 자체로 민감한 개인정보를 포함하고 있는 주민등록체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며 주민등록번호 제도 자체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고 나섰다.
행안부 상대 행정소송 제기
진보네트워크센터(이하 진보넷) 등 8개 인권단체와 네이트 해킹 피해자들로 구성된 83명의 소송인단이 지난 8일 행정안전부를 상대로 주민등록변경을 해달라는 내용의 행정소송 소장을 제출했다.
이들은 이날 소장 제출에 앞서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는 개인정보 유출 피해자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며, “주민번호를 변경하여 우리의 권리를 되찾겠다”고 소송의 취지를 밝혔다.
이들은 “이렇게 많은 주민번호가 허술하게 관리되어 온 것에 대하여 국가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며 “인터넷 실명제라는 명목으로 포털 사이트가 주민번호를 수집하고 이용하도록 지도해 왔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주민번호 변경은 꼭 필요한 조치이지만 행정안전부는 주민번호를 변경해달라는 우리의 민원을 거부했다”며 “따라서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앞서 이들은 주무행정기관인 행정안전부에 주민번호 변경신청을 냈지만, 행안부는 “주민번호가 공공과 민간에서 개인식별번호로 활용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허용할 경우 막대한 사회적 비용 및 혼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며 거부한 바 있다.
“이름도 바꿀 수 있는데…”
소송인단에 참여하고 있는 건국대학교 한상희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행정편의를 이유로 행정안전부가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면서 “정부는 국민생활의 안정을 보장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지적했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 활동하고 있는 ‘둠코(닉네임)’는 개인정보유출 피해사례와 관련해 “(주민번호 유출로) 아직 직접적인 피해를 당한적은 없지만, 주민번호를 다른 사람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은행에서 통장을 개설하는 것도 불안하다”고 털어놨다.
이번 소송의 변호를 맡은 김보라미 변호사는 “본인의 주민번호가 유출된 사람들은 보이스 피싱, 스팸 등에 시달리고 있다”면서 “주민번호 변경과 비슷한 개명에 대해 허용해야 한다는 대법원의 판례가 있는 만큼 법원이 전향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5년 대법원이 “범죄기도 또는 은폐나 법령에 따른 각종 제한을 회피하려는 불순한 의도나 목적이 개입되어 있는 등 개명신청권의 남용으로 볼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원칙적으로 개명을 허가함이 상당하다”는 판례를 내면서 개명이 활성화된 바 있다.
“주민등록제도 자체가 위헌”
이날 한상희 교수는 “주민번호는 공공·민간에서 개인식별번호로 활용될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이유로 변경을 거부하는 것은 부적법하다”며 “달리 변경절차가 마련되지 않은 주민등록제도는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현행 주민등록법 상 주민등록번호의 정정과 관련해 북한 이탈 주민의 보호와 같은 제한적 사유가 있을 경우 외에는 그 요건과 절차를 규정하고 있지 않는데, 이는 헌법 제17조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및 그 파생 권리인 자기정보통제권’에 위반된다는 것이다.
이날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출한 소장에서 소송인단은 “주민등록번호에 생년월일, 성별, 지역을 표시하도록 한 주민등록법 시행규칙 제2조는 타인에게 공개되지 않기를 바라는 정보이거나 상황에 따라서는 차별을 유발할 수 있어 기본권 제한의 법률주의 또는 포괄위임금지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이종회 진보네트워크센터 대표는 “이번 소송이 개인정보를 침해 우려가 있는 주민번호 제도에 대한 변화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며 “이번 재판 결과에 따라 헌법 소원 여부도 고려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국가기록원 자료에 따르면 1962년 5월 제정된 당시의 ‘주민등록법’에는 주민등록번호에 대한 내용이 아예 없었다.
전 국민에게 식별번호를 부여하기 시작한 계기는 1968년 1월21일, 북한의 특수부대 요원 12명이 청와대를 습격한 이른바 김신조 사건이다. 정부는 그해 11월21일부터 간첩 식별 편의 등의 목적으로 주민등록증을 발급했다.
처음에 부여한 주민등록번호는 총 12자리였고, 지금과 달리 생년월일은 적혀있지 않았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110101-100001번을 받았다. 1975년부터 13자리로 바뀌고, 앞 6자리는 생년월일이 되었다.
현재 세계에서 전체 국민에게 고유의 식별번호를 부여해서 신분체계를 관리하는 나라는 딱 2개 국으로 알려져 있다. 두 나라 모두 한반도에 있는 나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