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원참사 현장]신고하려 잡은 안내실 유선전화에 혈흔 그대로
사건 현장은 잿가루∙혈흔 등 뒤엉켜 ‘질척’
범행도구 몇년전 구입…계획범죄에 ‘무게‘
[매일일보=류세나 기자] 지난 20일 자정, 서울 논현역 인근 영동시장 내 ‘먹자골목’은 불야성을 이루던 ‘평소’와 달리 경찰의 삼엄한 통제 속에서 ‘음침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다름 아닌 이날 오전 8시 15분께 이 골목 D 고시원에서 벌어진 한 30대 실직 남성의 ‘묻지마 살인’ 때문. 이 사건으로 중국동포를 포함한 애꿎은 6명이 사망하고, 7명이 중상을 입었다.
경찰 조사결과 해당 고시원 3층에서 거주하고 있던 피의자 정모씨(31∙남)는 평소 사회에 대한 삐뚤어진 적개심을 갖고 있던 자로 사건 당일 ‘살기 싫다’며 자신의 방 침대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지른 뒤 화재를 피해 뛰어나오던 고시원 투숙자들에게 무차별적으로 흉기를 휘두른 것으로 밝혀졌다.
좁은 복도서 흉기피하기 위해 ‘발버둥’
경찰이 공개한 D고시원 사건현장은 당시의 말 그대로 ‘처참했다’. 건물 외벽이 그을리고, 여기저기 유리창이 깨진 파편이 튀어있는 것은 물론 곳곳에 혈흔자국까지 남아 당시의 급박했던 상황을 고스란히 대변해주고 있었다. 고시원 건물 1~2층에 자리 잡고 있는 횟집, 주점 등의 문은 굳게 닫혀 있는 상태였고, 고시원 입구로 이어지는 3층 계단은 소방수와 재 가루, 혈흔 등이 뒤엉켜 질척거렸다. 또 한걸음 한걸음 계단을 올라갈수록 짙어지는 매캐한 냄새는 자연스레 기자의 손을 코로 가져가게 했다.고시원 총무가 업무를 보는 3층 고시원 입구 안내실. 이곳에서부터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쳤을 피해자의 삶에 대한 강한 열망이 느껴졌다. 안내실 내부에 비치된 유선전화기에 피해자가 어딘가로 신고하기 위해 수화기를 붙잡았을 때 묻은 혈흔이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 사건발생 15여시간이 지난 고시원 복도의 상황도 끔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성인 2명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간신히 걸어갈 만한 좁은 복도에는 피범벅이 된 이불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투숙자들이 화재를 피하기 위해 일제히 뛰쳐나와 대피하기 조차 어려운 ‘좁은 복도’에서 살인마가 흉기를 들고 뒤쫓아 오는 상황은 그야말로 정씨에게 제대로 ‘차려놓은 밥상’이 된 꼴. 이 상황에서 정씨는 투숙자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흉기를 휘둘러댔고, 그 결과 중국동포 이월자(48∙여)씨를 포함한 총 13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나만 죽을 순 없지’
이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서울 강남경찰서에 따르면 정씨는 이날 오전 8시 15분께 자신이 거주하고 있던 D고시원 3층 B실 12호방 침대 위에 라이터용 휘발유 2통을 뿌린 후 일회용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직후 침대에 붙은 불은 정씨의 방 밖까지 확산됐고, 이내 건물 내부에는 연기가 자욱하게 퍼졌다는 게 경찰에서 밝힌 정씨의 진술이다. 이와 관련 정씨는 경찰에서 “아차” 싶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중학교 때 이미 ‘자살시도’
지난 20일 경찰이 1차 브리핑을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정씨는 경남 합천 출신으로 이미 중학교 때 한 차례 자살을 시도했던 적은 있었으나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은 없었다.경찰에서 “세상이 나를 무시해 더 이상 살기 싫었다”고 진술한 정씨는 금전적인 문제로도 고충을 겪어온 것으로 알려졌다.이에 대해 강남경찰서 김갑식 형사과장은 “고시원비가 한달에 20~25만원인데 장기거주해 온 정씨는 할인을 받아 월 17만원 정도로 거주하고 있었다”며 “그런데 이마저도 한 달 치가 밀려 있었고, 휴대폰 요금은 두 달이 밀려 있는 상태였다”고 밝혔다.김 과장은 이어 “또 정씨는 예비군 훈련 불이행 등으로 향군법 및 병역법 위반으로 내야할 벌금 150만원도 미납돼 있었다”면서 “병역법 위반 혐의로 수배 중이었다”고 말했다.2002년 8월 홀로 상경해 이듬해 9월부터 D고시원에 거주하며 중국집 배달, 주차요원, 식당 서빙 등 일용직 아르바이트를 전전해 온 정씨는 지난 8월 실직, 고시원에서만 생활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정씨가 범행도구로 사용한 흉기와 가스총을 2004~2005년 경에 동대문 중앙시장에서 구입했다고 진술하면서 사건당일의 ‘우발적인’ 범행보다 ‘계획범죄’ 쪽으로 무게 중심이 쏠리고 있는 상태다.류세나 기자<[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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