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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일보] 우리나라에서의 스카우트운동(Scout Movement)은 1922년에 시작됐다. 당시 조철호 선생은 조선소년군을, 정성채 선생은 소년척후단를 창설했다. 이 두 단체가 우리나라에서의 스카우트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한국스카우트연맹은 올해 창립 98주년을 맞이하는 청소년NGO로, 1922년에 창설된 조선소년군과 소년척후단이 모태다. 두 단체는 일제치하에서 청소년들에게 애국심과 민족혼을 고취시키고 호연지기 등을 함양시켜 장차 조국광복의 역군으로 육성키 위해 조직됐다.
1924년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은 소년척후단 조선총연맹을 창설하여 초대 총재를 역임했다. 선생은 보이스카우트 본래 순수한 취지의 교육이념과 교육방법을 지키려는 입장과 교육이념과 방법을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도록 바꾸려는 입장으로 양분됐던 조직을 하나로 통합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소년척후단 조선총연맹 총재로서 청소년들에게 “소년이여, 준비하라! 독립과 미래를 위하여”라 훈육하는 등 조국광복에 앞장섰으며 일제는 항건에 태극문양을 넣는 등 연맹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여러 구실을 빌미로 1937년 강제로 연맹을 해산을 시켰다.
스카우트운동은 해방 다음해 3월에 대한보이스카우트로 발족하였고 백범 김구 선생 등이 총재를 맡아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였음은 물론 1952년엔 한국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피난지인 부산 일광해변에서 제1회 한국잼버리를 개최해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갖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1851년 충남 서천에서 출생하여 젊은 시절엔 제3차 신사유람단 수행원, 주미외교서기관 등을 역임했다. 이후 일본과 미국을 시찰하여 새로운 문물을 살폈고 내각 총서, 의정부 총무국장 등 여러 요직을 역임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성격이 대쪽 같고 오르지 독립밖에 모르는 분이어서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는데 한 가지의 일화를 소개해 본다.
이상재 선생이 일본 시찰단 속에 소속돼 일본에 갔었던 얘기다. 일본은 힘을 과시하기 위해 큰 병기 공장을 구경시켜주고는 감상이 어떠한지를 물었다. 이상재 선생은 서슴치 않고 대답하길 “과연 대포며 총이 산더미 같이 있는 걸 보니 일본이 강한 나라라는 걸 새삼 알겠소이다.”
하지만 성경말씀엔 “칼로써 일어난 자는 칼로 망한다 했거늘 그것이 심히 염려 되오”라 말했다. 이는 일본이 무력만을 앞세워 침략을 함부로 하는 것을 꾸짖고 너희도 그러다가는 무력에 의해 망할 것을 풍자했는데 선생의 말이 1945년 8월에 적중해 일본이 무력에 의해 망하기에 이른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오직 독립운동과 청소년운동에 헌신하신 위대한 지도자 중의 한분으로 스카우팅(Scouting)의 불사신이라 할 만큼 일생을 통해 스카우트 정신에 충실했던 선각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