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이광표 기자] 은행들의 올 1분기 대손충당금 적립액이 전 분기 대비 반토막 났다. 대손충당금은 미래에 발생할 손실에 쓰기 위해 미리 쌓아두는 자금이다.
미국발 금리 인상에 추후 대출 부실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은행권의 사전 대비가 안일한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오는 9월 코로나19 대출 만기 연장, 상환유예 조치 종료 이후 대출 부실이 심화되면 은행들의 건전성이 우려된다는 지적도 동시에 나온다. 이에 금융당국은 은행권을 향해 충당금을 추가 적립하라고 압박 중이다.
19일 금융권에 따르면 올해 1분기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의 대손충당금 전입액은 총 3096억원이다. 전분기 대손충당금(6390억원)보다 51.5% 급감했다.
5대 은행은 코로나19 대유행 시기인 2020년 2분기엔 1조671억원에 달하는 충당금을 쌓은 바 있다. 현재 충당금이 급감했지만 은행들은 현재 건전성 지표가 좋은 상태이며, 추후 부실도 감당 가능하다고 항변한다.
실제 5대 은행의 1분기 말 평균 부실채권(NPL) 비율은 아직은 낮은 수준이다. NPL은 총대출 중 3개월 이상 원리금이 연체된 대출이 차지하는 비율을 말한다. 은행별 NPL 비율은 국민은행이 0.20%로 가장 낮고 농협(0.23%) 하나(0.24%) 우리(0.28%) 신한(0.26%) 순이다. 은행들이 부실 대출을 털어내기 위해 충당금을 활용할 수 있는 비율(NPL 커버리지 비율)도 평균 200%를 웃돈다. 지금보다 두 배 이상 대출 연체가 발생하더라도 문제가 없다는 얘기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당국 입장에선 더욱 더 보수적으로 은행들을 압박할 수 밖에 없겠지만, 은행들도 코로나19 사태 이후 꾸준하게 충당금을 쌓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고물가·고금리·고환율의 3고(高) 여파로 경제 불확실성이 커진 만큼 은행권이 건전성 관리에 집중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시작된 소상공인·중소기업 대출 만기 연장, 상환유예 조치가 끝나는 오는 10월부터는 부실 대출이 급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020년 4월부터 만기 연장, 상환유예 조치를 받은 대출 원리금은 291조원에 이른다.
구체적으론 △만기 연장 276조2000억원 △원금 상환 유예 14조5000억원 △이자 상환 유예 2440억원 등이다. 문제는 이 대출에 대한 잠재 부실이 현재는 반영되지 않아, 금융권의 건전성이 양호한 것으로 보이는 ‘착시’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의 가계부채 규제 대책과 맞물려 은행권이 기업대출을 늘린 점도 위험을 키우는 요인으로 꼽힌다. 1분기 말 4대 시중은행의 기업대출 총액은 572조3949억원으로 전년보다 11.7%(59조8400억원) 증가했다. 같은 기간 가계대출 잔액은 570조2628억원으로 작년 대비 3.5%(19조2661억원) 늘어나는 데 그쳤다. 가계대출은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등 규제 강화 여파로 증가세가 주춤한 반면 기업대출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금융 지원 등으로 빠르게 증가했다.
이에 더해 미국의 금리인상에 따라 한국은행 또한 추가 기준금리 인상이 전망되는 등 차주들의 부채 상환 부담이 날로 커져간다는 점도 잠재 리스크다. 한은에 따르면 변동금리 대출을 보유한 차주는 기준금리가 0.25%포인트 인상되면, 연간 대출 이자만 평균 16만4000원 늘어난다. 가계대출 중 변동금리 대출 비중은 지난해 말 76%에 달하는 상황이다. 기준금리 인상으로 대출상환 능력이 떨어지는 부실 차주 발생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이에 금융당국은 은행들에 충당금을 미리 적립해 부실대출을 대비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선진국 경기둔화와 국내경제 하방리스크 등 대내외 불확실성이 크게 확대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금융감독원은 "급격한 금리인상 등 시장 변동성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은행이 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손실흡수능력 확충을 유도하겠다"면서 "대손충당금 산정시 미래 전망 정보를 합리적으로 반영토록 개선하기 위해 현재 은행권 테스크포스(TF)도 운영 중"이라고 설명했다.
정은보 금융감독원장 또한 지난 3일 열린 ‘은행장 간담회’에서 은행들에 충당금 적립을 강조했다. 당시 정 원장은 "대내외 충격에도 은행이 자금 중개 기능을 차질없이 수행할 수 있도록 손실 흡수 능력을 확충할 필요가 있다"며 "평상시 기준에 안주하지 말고 잠재 신용위험을 보수적으로 평가해 대손충당금을 충분히 쌓아야한다"고 말했다.
서영수 키움증권 연구원은 "4대 국내 은행의 충당금 잔액은 총대출채권의 0.44%로 전세계 주요 국가 중 가장 낮은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서 연구원은 "과거 부도율 중심으로 (충당금을) 산정하다 보니 대출자의 미래 부도 위험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이라면서 "금리 인상에 따른 자산시장 침체 장기화 시 대손 비용이 급증하고, 이는 금융 안정위험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