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문화재연구원, 영조 딸 화협옹주 이장 전 무덤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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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문화재연구원, 영조 딸 화협옹주 이장 전 무덤 확인
  • 김종혁 기자
  • 승인 2016.12.28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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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 여인의 문화를 알 수 있는 명기류 등 발굴
[매일일보 김종혁 기자]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남양주시와 (재)고려문화재연구원이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조선 제21대 임금인 영조와 후궁 영빈 이씨의 소생인 화협옹주의 이장되기 전 무덤이 남양주시 삼패동에서 확인됐다.참고로 화협옹주의 현재 묘는 남양주 평구마을로 이장된 상태로, 남편인 신광수와의 합장묘이다. 발굴 현장은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 산43-19 번지 일대이다.

화협옹주(和協翁主, 1733∼1752년)는 사도세자의 친누나이며, 조선 22대 임금 정조의 친고모로 11세에 옹주로 봉작(封爵)됐으며, 영의정 신만의 아들 영성위 신광수(永城尉 申光綏)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옹주는 어머니 영빈 이씨를 닮아 미색이 뛰어났다고 하며, 후사 없이 20세에 홍역으로 사망했다.
봉작(封爵)은 내명부, 외명부의 직위를 받는 것을 말하며 하가(下嫁)는 지체가 낮은 곳으로 시집간다는 뜻으로 주로 공주나 옹주가 신하와 결혼하는 것을 뜻한다.

옹주의 묘지로 확인된 남양주시 삼패동에서는 지난 해 8월 목제 마(馬)와 석함 1개가 발견된 이후 같은 해 11월에 1차 긴급 조사 이뤄지면서 석함 1개와 백자명기 등이 추가로 수습됐다.올해 12월에는 남양주시에서 문화재청의 긴급 발굴 조사비를 지원받아 2차 조사가 진행됐다.2차 조사에서는 화협옹주의 장지라는 것을 증명하는 묘지(墓誌)와 지석(誌石), 청화백자합 10점, 분채(粉彩) 1점, 목제합 3점, 청동거울과 거울집, 목제 빗과 직물류가 수습됐다. 
화협옹주의 장지라는 것을 증명하는 묘지(墓誌)와 지석(誌石) 전면 사진<문화재청>
지석(誌石)은 죽은 이의 인적사항이나 무덤 소재를 기록해 묻은 판석 또는 도판을 말하며 분채(粉彩)는  명‧청나라 때 행하여진 백자에 그린 그림 기법이다.묘지는 회곽묘의 오른편에 ‘유명조선화협옹주인좌(享有盛誉朝鮮和協翁主寅坐)’라고 쓰여 있는데 회를 정사각형으로 만들고 글자 안에 먹을 채워 넣었다.  
2호 석함 출토유물 <문화재청>
1장의 석판으로 이루어진 지석의 앞면과 뒷면, 옆면에는 총 394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 옆면에 ‘어제화협옹주묘지(御製和協翁主墓誌)’라는 글이 있어 아버지인 영조가 직접 지은 글임을 밝히고 있으며, 젊은 나이에 먼저 간 자식에 대한 애틋한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명기는 화장품류로 추정되는 내용물로 채워진 청화백자합과 분채 등이다. 유기물 자료가 드물 뿐 아니라 조선 시대 실물자료가 거의 없는 현재 상황에서, 이번에 발굴된 자료들은 내용물 감정과 성분 분석 등을 통해 조선 시대 왕실 여인들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화장도구로 추정되는 기물도 남아 있어 그 가치를 더하고 있다.
석함 3 일괄 유물 <문화재청>
 명기(明器)는 죽은 이의 내세 생활을 위해 무덤에 함께 부장하는 기물을 일컫는다.작년에 긴급조사로 수습된 석함 2개와 순백자명기, 칠기명기와 이번 2차 조사 성과물인 묘지와 지석, 석함 1개, 회곽묘 등을 통해 사대부가와 혼인한 왕녀의 상장례를 알 수 있고, 영조가 직접 쓴 묘지와 화장품 안료, 용기 등을 수습할 수 있어 학술자료로서도 매우 큰 성과로 평가된다.한편, 문화재청과 남양주시는 앞으로도 추가 발굴조사를 통해 화협옹주묘를 더 세밀히 조사할 예정이다.


좌우명 : 아무리 얇게 저며도 양면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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