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일보 정수남 기자] 몇 년만에 오이도행 전철에 몸을 실었다. 3년 전 여름 휴가, 큰 아이와 자전거를 실고 오이도에서 내려 시화방조제를 찾은 이후 처음이다. 하지만 이번 방문길은 숙연키만하다. 세월호 침몰 사고로 청춘의 꽃을 피워 보지도 못하고 저 바다 밑마닥에 고스란히 누워야만 했던,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과 교사들의 임시 합동분양소를 찾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임시합동 분양소가 있는 안산 올림픽기념관이 있는 고잔역에서 내렸다.안산은 반월공단과 시화공단이 각각 위치 지난 80, 90년대 우리나라 경제발전을 견인한 산업도시라는 명성과는 달리, 고요하기 그지 없다. 이번 사고로 도시 전체에 깊은 침묵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침 출근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흔한 자동차 경적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반면, 도시는 온통 검은색과 하얀색 일색인 회색 도시다. 하얀천 위에 검은 글씨, 혹은 검은색 천 위에 하얀 글씨로 ‘단원고 학생들의 명복을 빕니다’. ‘살아서 돌라오라’는 글귀의 현수막이 지천이다.이로 인해 무채색 옷을 입은 행렬의 인파와 함께 도시는 온통 회백색이다.아침 이른 시간임에도 고잔역에서 인근 임시분양소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 정류소에 조문객들이 물밀듯이 몰려온다. 세월호 침몰 때 바닷물처럼. 멀리 서울을 비롯해 수도권 일대에서 온 사람들이다.셔틀버스에 몸을 실었다. 채 5분도 안돼 임시분양소 도착하자마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오는 길에 울지 말아야지 수 없이 다짐했지만, 수백명의 청춘들이 누워 있는 분양소에서 맥없이 무너졌다. 기념관 앞 삼거리는 조문 차량과 출근 차량 등이 엉키면서 교통 체증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역시 경적소리는 커녕 숨소리 조차 들리지 않는다.먼저 젊은 영혼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영전 앞에 한송이 국화꽃을 바쳤다. 미안한 마음과 함께...제대하던 지난 1993년 고향 부안 앞 바다에서 서해 훼리호가 침몰했다. 꽃다운 청춘들이 고기밥이 됐다. 이듬해 복학하자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그 사고로 친구 하나도 세상을 등졌다. 이듬해 삼풍백화점이 쓸어지면서 당시 나와 동년배이던 20대 중반의 선남선녀들이 무거운 콘크리트에 깔렸다.그때는 기성세대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반대가 됐다. 내가 기성세대가 돼 고스란히 그들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한다. ‘미안하다, 얘들아....’조문을 마치고 나오자, 기념관 앞마당에서 바로 옆 안산도시공단 앞마당까지 전국에서 보내 온 조문 물품이 가득히 쌓여 있다. 또 조문객들이 간단한 음료와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천막을 치고 임시 식탁을 배치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음식을 먹지 않는다. 일반적인 상가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흐느끼는 유가족과 조문객들 사이에서 음식을 넘길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대신 이들은 빈소 출구에 마련된 메모지에 ‘살아오라’는, ‘편안히 잠들라’는 글 등을 적어 벽에 붙이거나, 화장지로 연신 눈물을 닦고 있을 뿐이다. 이중 일부는 이곳에서 100여미터 떨어진 단원고로 발길을 옮긴다.
단원고 정문에 도착한 이들은 또 메모지에 같은 문구를 써서, 노란색 리본과 함께 축대 등 여기 저기에 매단다.이곳에는 23일 분향소 개소와 동시에 부지런히 다녀 간 조문객들이 놓고 간 돌아오지 않는, 혹은 유명을 달리한 학생들을 위한 음료수와 추도 촛불, 또는 저승길 노자 돈 등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려있다. 이곳 풍경도 임시분향소와 별반 차이가 없다. 오히려 울음 소리가 더 크기만 하다.이런 상황에서 독자에게 생생한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기자란 직업이 참 가증스럽기만 하다. 그러면서도 연신 셔터를 누르면서, 흐르는 눈물을 닦는다.산중턱에 있는 학교로 접근이 불가능, 뒤편 단원중학교로 발길을 돌렸다. 학교 옆 주택가를 지나자 곡소리가 들린다. 유족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뒤범벅이다.현재 이곳 안산에서 아이나, 어른이나, 노인이나 길을 걸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게 흉이 아니다. 다른 때 같으면 타인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을 텐데 말이다.단원중 운동장에서 바라본 단원고 교사는 적막하기 그지 없다. 2학년 교실은 창문이 꼭꼭 닫힌 채, 지난 24일부터 수업을 재개한 3학년 교실의 창문만 몇군데 열려있다. 또 간혹 교사들이 침통스런 표정으로 교정을 걸어가고 있다.학교 앞 근린공원에 오르자 학교가 한 눈에 들어온다. 교사 앞에는 학생 몇몇이 이날 고(故) 김시연 학생의 운구 행렬을 맞기 위해 침통한 표정으로 벤치에 앉아있다.공원에서 내려와 학교 정문에 다시 도착하자 운구 행렬이 들어서고 있다. 삼삼오오 모여 있던 조문객들은 이에 아예 넋을 놓고 울음을 터트린다. 기자도 마음 놓고 울어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점심시간에도 단원고와 바로 뒤 단원중, 앞 고잔초등학교 운동장에는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고, 따가운 봄 햇살만이 사방으로 퍼지고 있다. 어느 시인이 노래했던가? ‘찬란한 슬픔이라고...’다시 임시분향소 앞이다. 검은색 정장 물결이 더 길어졌다. 고잔역으로 가는 길에는 셔틀버스를 포기하고 걸었다.이곳 안산에 반나절을 머무는 동안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과, 두 문장 이상이 엮어진 복합문을 들어보지 못했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지금 안산에서는 말이 필요없다.대한민국이 깊은 슬픔에 빠졌지만, 안산은 더 큰 슬픔의 수렁에 빠졌다. 덜컹거리는 전철에 몸을 실으니 다시 한번 슬픔이 복받친다. 그리고 생각해 본다. 이번 사고가 대한민국의 축소판이라고... 정치, 행정, 교육, 재계 등 모든 비리가 칡넝굴처럼 얽혀 있는....국민소득 3만불 시대가 오면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될까?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돼지가 진주를 가진들... 돼지는 돼지일 뿐이다. 20여년 전 서해 훼리호, 성수대교, 삼품백화점 사고 당시에도 지금처럼 요란을 떨었지만, 강산이 두번 바뀌었어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죽은 사람만 불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