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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문맹은 일상의 난민이다. 금융자본주의에 종속된 현대인에게 세상을 읽을 수 없는 상태는 생존을 위협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문맹이 많고 위험한 상품은 보험이다. 주식이나 펀드는 읽지 못하면 겁을 먹고 피할 수 있다. 하지만 보험은 문맹인 상태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 자동차보험처럼 법으로 가입을 강제하는 의무보험도 존재하며, 문맹률이 높은 금융 소외 계층일수록 보험이 필요하다. 특히 보험 상품은 가입 직후 문제가 드러나지 않는다. 계약 체결 시점부터 존재했던 문제는 대부분 사고 후 발견된다. 그래서 다수의 계약은 보험금을 두고 분쟁으로 번진다. 하지만 모든 상황은 약관을 읽을 수 없는 자에게 불리하다.보험을 두고 ‘정보비대칭이 가장 심한 금융’이란 평이 붙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정보가 생산되고 전문가가 등장한다. 감독당국도 보험문맹의 고질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최근에는 인슈어테크(Insurance+Technology) 스타트업도 여기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혼란은 가중된다. 과거 보험을 둘러싼 정보비대칭 문제는 정보독점에서 발생했다. 정보의 유통과 공유가 어려웠기 때문에 보험사만 정보를 소유했다. 하지만 최근 정보비대칭은 정보의 범람에서 발생한다. 모두가 보험 전문가를 자칭하며 근거 없는 말을 쏟아낸다. 글을 읽을 수 없는 자는 사이비의 달콤한 말에 속는다. 그리고 사고가 없다면 진실이 밝혀질 시간은 지연된다.잘못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유일한 방주(方舟)는 보험약관이다. 정보가 독점되었던 과거부터 넘쳐나는 현재까지 단 하나의 해결책은 약관을 읽는 것이다. 그런데 너무 어렵다. 혼란을 해결할 유일한 지침서에는 전문용어가 난무한다. 이 때문에 보험문맹은 곧잘 보험사와 자신을 이어줄 중개인에게 기댄다. 하지만 보험설계사 중 상당수는 보험약관을 제대로 읽지 않는다. 유일한 기준을 무시한 채 보험사나 영업관리자가 구두(口頭)로 전파하는 말을 그대로 반복한다. 결국 중개인에 대한 문맹자의 신뢰는 사고 후 불신과 분노로 변한다. 보험금과 관련된 많은 분쟁을 두고 ‘약관을 읽지 않은 소비자’를 탓하는 일이 흔하다. 보험 계약의 기준을 주의 깊게 살피지 않은 것을 개인의 잘못 또는 불행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글을 읽지 못하는 자에게 독해를 요구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다. 보험 약관을 읽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독해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소비자는 계약을 위해 설계사를 만나고, 사고 후 보험금을 받기 위해 손해사정사를 찾는다. 보험금 지급의 전제조건은 사고 전 제대로 된 계약체결이다. 하지만 이를 담당하는 중개인의 약관 이해도는 상당히 떨어진다. 오늘도 문제 있는 계약은 지속적으로 체결된다.결국 유일한 해결책은 약관을 읽지 못하는 사람에게 읽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이를 위해 감독기관에서도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인다. 약관 이해도 평가를 실시하거나 지속적으로 보도 참고 자료를 배포 중이다. 하지만 보험사 간 상품 경쟁으로 인해 새로운 약관은 급속도로 증가하기 때문에 문맹퇴치는 어렵다. 배움의 속도보다 이해해야 할 대상이 더 빠르게 늘어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핵심을 직시해야 한다. 거의 모든 보험 분쟁은 보험금 지급 여부와 관련된다. 보험금을 둘러싼 계약 양측의 다툼은 대부분 계약 전·후 알릴의무 등이 규정된 보통약관의 잘못된 이해에서 발생한다. 보험가입의 목적은 사고 후 보험금을 받기 위함이다. 보험금 지급여부의 핵심은 보통약관에서 정한다. 따라서 보험 산업이 소비자의 보통약관 이해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움직일 경우 분쟁의 상당수를 해결할 수 있다. 불신이 넘치면 보험 산업을 지탱할 소비자는 떠난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보통약관을 제대로 읽힐 시간이다.